김명석(가명) 전 노동당 간부 수령독재로 유지되는 북한에는 민주국가에서는 보기 힘든 희한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화재현장에서 수령의 초상화부터 구해야 하고, 뒤집힌 배에서 수령의 초상화를 비닐에 싸서 가슴에 품고 죽은 선원은 영웅이 된다. 수령은 동상, 사진, 심지어 고목나무에까지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북한에서 노동당 산하기관에 근무할 때 있었던 웃지 못할 일화를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북한에는 「구호나무」라는 것이 있다. 구호나무는 일제시대 때 김일성이 인솔하는 항일유격대(발치산)가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을 칭송하는 문구
김명석(가명) 전 조선노동당 간부대한민국에 온지 이제 1년이 넘었다. 남성 권위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북한에서 살다가 남한에 오니 불편한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 여성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몸에 배있지 않은 것이다.북한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하는 흔한 농담도 한국에선 바로 성희롱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아 매사 발언에 조심하고 있다. 자칫 했다가는 아주 무례한 사람으로 찍힐 것 같아 항상 조심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북한에서 밴 습관을 버리지 못해 말을 함부로 하거나 여성들에게 결례를 범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
이명석 가명, 전 조선노동당 간부 나는 얼마 전까지 북한 조선노동당 주요 부서에서 근무했다. 신상의 이유로 구체적인 사항은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겪으면서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남한 국민들이 너무나 모르는 부분이 있어 이 글을 쓴다. 1994년 김일성 사망을 전후한 시기까지 북한은 소위 ‘공급시대’였다. 모든 주민들에게 식량, 생필품을 국가가 배급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 살아 있던 시기였다. 1995년 이후부터는 국가의 공급체계가 붕괴되면서 ‘대량 아사시대’가 도래했다. 이때는 국가의 공급도
김태진(49, 전 요덕수용소 출신) 북한민주화운동본부 공동대표내가 태어난 곳은 중국 길림성 용정시 삼합이라는 곳이다. 삼합은 북한 함북 회령, 무산, 온성 등에서 탈북하는 사람들이 거쳐가는 주요 경로이기도 하다. 중국 국적의 동포였던 아버지와 북한 국적의 어머니는 6ㆍ25전쟁 때 인연을 맺게 됐고, 이후 중국생활을 청산하고 부모님을 따라 6살 때 함북 청진으로 이사를 했다. 강원도 원산과 평남 평성에서 인민학교(지금 소학교)와 고등중학교(지금 중학교)를 졸업했고, 72년에 인민군 자동차양성소와 원산 원동기공장에서 근무했다.북한은 내
김태산 前조선ㆍ체코 신발기술합작회사 사장내가 200여 명의 평양 처녀들을 데리고 체코 프라하 공항에 도착한 것은 2000년 7월이었다. 까만 머리의 동양 처녀 200여 명이 한꺼번에 내리니 우리를 쳐다보는 체코인들은 아마 꽤 놀랐을 것이다. 게다가 가슴에는 모두 김일성-김정일 초상휘장(뱃지)까지 달고 있었으니 더 신기해 했을 것이다.당시 체코에는 북한 은하무역지도국이 2곳, 경공업성이 다섯 곳의 공장에 인력을 수출하고 있었다. 1989년부터 30명 정도의 소규모로 인력을 파견해 오다가 2000년 들어 외화벌이 목적으로 대규모 인력을
김영순(68) 전 함흥시 동흥산구역 인민반장북한은 선군정치를 통해 외형은 군대가 지탱하지만 내부는 「인민반장」이 지킨다.남한의 동(洞) 아래 반(班)에 해당하는 인민반을 책임진 인민반장은 주민을 감시하는 제1일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변변한 데모 한번 일어나지 않고 주민들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처져 있는 감시망 때문인데 인민반장이 그 감시망의 1선을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안전보위부의 눈과 귀의 구실을 한다. 인민반을 알면 북한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함흥시 동흥산구역 운흥
1990년대 후반 처참했던 북한의 대(大)아사 현장을 지켜봤던 한 탈북 시인이 그 참상을 詩로 써 보내왔다. 시인은 여기에 실린 시 외에 북한의 실상을 전해주는 시들을 모아 곧 시집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시인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본인의 신상을 밝히지 못하는데 대해 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한다고 말했다. 시를 올리며-시인의 말 전쟁도 아니다. 자연재해도 아니다. 이 지구상엔 평화시기 300만이라는 목숨을 굶겨 죽인 김정일정권이 있나니. 이러한 대(大)참사를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가볍게 명명했다. 300만의 죽음도 고난 정도로
박광일 前북한 중등학교 교사내가 태어난 곳은 함경남도 함흥시이다. 나는 거기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함남 함흥 의 성천강고등중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했다. 부모님이 일본에 사시다가 북한의 허위선전에 속아 1960년대 초 입북했으나 다행히 일본 친척들의 도움으로 가정형편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였다.이런 평범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난 내가 평소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주변의 친한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다가 남한방송을 듣게 됐고, 얼마 뒤에는 남한영화를 보고 나중에는 남한의 드라마 테이프까
차성주 (40ㆍ전 인민군 소좌)나는 황해도 배천의 인민군 4군단 26사단 49포병연대 3대대 참모장으로 있다가 1997년 9월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 남한으로 귀순한 전 인민군 군관(장교/소좌; 소령)이다. 최근 최전방에 배치된 북한 장사정포의 위협에 대한 우려가 국감장에서 거론되면서 나오는 자료나 증언을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소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북한 장사정포와 중거리포의 위력이나 대응방안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제시해 볼까 한다.남쪽에서 말하는 장사정포는 사거리 40㎞ 이상의 야포를 말하는 것으로 240㎜
안명철(35) 전 회령 제22호 정치범수용소 경비병북한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함경남도 홍원이 고향인 나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대학보다는 인민군에 입대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군대 제대 후 대학을 가면 출세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당(黨) 간부로 계셨고,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핵심군중」에 속하는 우리 가정의 성분배경 덕분에 나는 1987년 인민군에서도 가장 중요하고도 출세길이 빠르다는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인민경비대에 입대하게 됐다. 내부적으로는 국가안전보위부 제7국 조선인민경비대 0000군부대 또는 000보위부로 불린다.
◇ 1997년 3월 30일 황해북도 탁아소에서 식량난으로 먹지 못해 힘없이 누워있는 북한어린이 모습. /AFP연합 사진제공자식들이 부모 목 매단 '엽기사건'도함흥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탈북전까지 쭉 살아온 제 2의 고향이다. 동해와 함주벌, 큰 공장이 밀집한 함흥은 예전부터 몇 안되는 살기좋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벌어진 어이없는 집단 아사의 악몽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북한의 식량난은 1990년 초부터 시작돼 김일성 사망과 함께 본격화 됐다. 1994년 북한의 ‘영생교주’인 김일성이 죽자 여기저기서 울고불
김은혜(가명. 여, 35세)ㆍ 함북 무산 칠성세관 근무내가 근무했던 칠성세관은 함경북도 무산군에 위치한 북-중 국경 세관이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자유주의 바람이 북한으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는 일선의 관문이기도 하다. 무산군은 북한 최대의 철광석광산인 무산광산으로 유명하며, 출신성분이 불량한 사람들의 추방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평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광산촌인데다 토지가 척박하고 광산 이외에는 생업이 기반이라고는 없어 사람이 살만한 지역이 못되는 곳이다. 북한당국이 이른바 「적대계급」 출신자들을 이곳에 추방한 것도 이런 연유에
김명희(가명)·前집단체조창작단 단원1997년은 평양시민들에게도 큰 시련의 해였다. 지방에서는 1995년부터 식량배급이 중단돼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하지만 평양에서는 1996년 후반부터 배급이 끊기기 시작해 1997년에 완전히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외화를 가진 일부 부유층은 사정이 달랐지만 평범한 시민들은 이때부터 먹는 것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식량난에 전기까지 끊기고 겨울에는 난방조차 되지 않아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냉장고」로 변했다.물이 안 나와 대동강에서 물을 길어오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평양시민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평양이지만 탈북 직전에는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새별군(옛 경원)에서 살았다. 지금은 중국의 개혁ㆍ개방으로 중국물건이 싼값에 물밀듯이 들어와 예전보다는 살기가 좋아졌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출신성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 추방돼 어울려 사는 「귀양지」였다.어머니는 6.25때 서울에서 의용군에 입대해 월북했고, 나중에 의사가 됐으며 나도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함흥약대를 졸업하고 약사가 됐다. 남한 출신이라는 「멍?뭉㏏??극심한 천대속에 우리 가족은 평양에서 멀리 새별군으로 쫓겨갔다. 나는 새별군 하면탄광
/김성준(가명) 전 인민군 4군단 26사단 대위내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에 입대해 처음 배치된 곳은 휴전선과 가까운 서부전선 4군단 26사단이었다. 여기서 나는 사병으로 10년 복무한 뒤 장교로 선발돼 전부 14년간을 근무했다. 이곳은 임진강과 예성강, 한강의 물이 바다로 유입되는 곳으로 넓은 뻘이 남과 북을 가로막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강화도가 바라다 보이고, 맑은 날이면 쌍안경으로 멀리 서울까지도 어슴프레 보였다. 육지가 맞닿아 있는 최전방은 민경부대가 경비를 맡고 있지만 넓은 강과 뻘이 펼쳐져 있는 전선은 26사단이 지
박영학(35)/ 양강도 혜산시 전파감시소 감독원내가 태어난 곳은 백두산 자락의 양강도 혜산이다. 이곳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장백조선족자치현과 맞닿은 최북단 국경지대다. 중국쪽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고 하면 한강을 사이에 둔 서울의 강북과 강남쯤의 거리를 연상할 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압록강이라고는 하지만 상류여서 작은 개울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경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을 때여서 아무 때나 왔다갔다 하곤 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이쪽이나 그쪽
조현우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남한에는 장마당(시장)이 없는 줄 알았다. 내 딴엔 백화점이 남한의 장마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대문이나 동대문같은 큰 시장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놀랐다. 내가 살던 함북 청진에도 그보다는 아니지만 크고 명성이 높은 수남장마당이 있다. 타지방 사람들도 알아준다. 북한에도 백화점이나 직매점같은 상점이 있긴 하나 문만 열어놓을 뿐 물건이 없어 운영은 되지 못했다. 외화상점이나 선원구락부같은 고급상점은 부유층이나 엘리트만이 이용하는 곳으로 일반사람들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곳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
86년 김정일, 당·수령에 인민의 충성심 강조80년대 동유럽 체제 변화에 대한 대응책『동무들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체적 생명을 조국통일을 위해 기꺼이 버릴 수 있을 때 정치적 생명은 영생불멸할 것이오.』88 서울올림픽 저지를 위해 대한항공 KAL 보잉 707여객기 공중폭파 임무를 띠고 평양을 출발하는 김현희 일행에게 이틀전인 1987년 11월 10일 대남공작 담당부서인 대외정보조사부(현 35호실) 부장이 당부한 말이다. 인간의 생명을 육체적 생명과 사회정치적 생명으로 구분하고 사회정치적 생명을 위해 육체적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정현철/2000년 입국· 상지대 한의예과 재학지금쯤 북한은 송화철이 한창일 것이다. 남한에서도 널리 시판되고 있는 노란 소나무꽃 가루말이다. 북한에서 송화는 송이·약초·해산물 등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외화벌이 수단이다. 농촌 산간 지역에서는 실제로 주민들이 송화로 생계를 잇기도 한다. 내 고향 함경북도 명천군에서는 해마다 5월부터 7월까지 송화를 채취하는 외화벌이 운동으로 전군(全郡)이 떠들썩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소나무숲이 있는 산이면 어디든 사람천지를 이룬다. 협동농장에서 농장원으로 일했던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소나
황보영/99년 입국·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수북한에서 12살 때 아이스하키(북한에서는 「빙상호케이」라고 한다)를 시작했다. 고등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함북 청진의 김책제철체육단에서 우리 학교로 선수 선발을 위해 직접 찾아와 발탁됐다. 어머니가 기계체조를 했으므로 운동신경은 타고난 편이었다. 한국에서 아이스하키라면 비싼 장비를 마련할 수 있는 부유층이 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북한에서는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개인이 돈을 낼 필요는 없다. 장비는 무료고, 링크 대관료 같은 것도 없다. 오히려 북한에서는 자식이 체육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