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철(35) 전 회령 제22호 정치범수용소 경비병

북한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함경남도 홍원이 고향인 나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대학보다는 인민군에 입대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군대 제대 후 대학을 가면 출세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당(黨) 간부로 계셨고,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핵심군중」에 속하는 우리 가정의 성분배경 덕분에 나는 1987년 인민군에서도 가장 중요하고도 출세길이 빠르다는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인민경비대에 입대하게 됐다. 내부적으로는 국가안전보위부 제7국 조선인민경비대 0000군부대 또는 000보위부로 불린다.

국가안전보위부 직원은 대부분 보위부 산하 인민경비대 근무자들 가운데서 차출된 뒤 대학 교육과정을 거쳐 선발된다.

인민경비대에 입대하게 되자 나는 당과 수령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세상물정을 모르는 철부지 시절의 추억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나는 신병훈련을 마치고 1989년에 해산된 함북 경성의 제11호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배치됐다. 이후 역시 해산된 함북 온성군 종성노동자구에 있는 제13호 관리소를 거쳐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회령의 제22호 관리소에서 약 7년간 경비병으로 근무했다.

경비병이라는 직무때문에 함경북도 일대에 집중 설치돼 있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는 대부분 경험할 수 있었다. 경성ㆍ온성 수용소가 해산되면서 함남 요덕수용소와 함북 회령수용소로 정치범들이 분산 수용됐다.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정치범이 희생당했던 온성지구에는 어린 아이와 아낙네들, 노인들이 회령으로 끌려왔다. 회령으로 호송되는 정치범들이 포승에 묶인 채 기차에서 내려 아들과 어머니가 경비대의 총구에 떠밀려 강제로 갈라지면서 분산 수용되던 모습은 마치 나치수용소에서 가스실로 끌려가기 직전 유태인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회령수용소는 지금도 5만 명의 정치범과 가족들을 수용하고 있는 북한 최대의 정치범수용소다.

우리는 신병교육 첫날부터 『여기 수용된 자들은 인민의 적으로, 추호의 동정도 보여서는 안되며 만약 이를 어길시 너희가 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교육을 받았다. 한마디로 저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항하거나 도주하는 자는 즉시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까지 받고 보니 정말 그들은 인간이 아닌 동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범도 인간이었고, 천진한 아이들과 이야기 해보면 그들이 왜 이런데 끌려와서 노예처럼 혹사당하며 죽어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임무가 그들을 지키는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수용소 7년간 경비병으로 있으면서 보고 듣고 느낀 엄청난 사건들은 너무나 많지만 함북 온성군 종성노동자구에 있는 제13호 관리소에서 보고 듣게 된 「죽기골」에 얽힌 이야기는 지금도 공포에 질릴만큼 나의 뇌리에서 지어워지 않는다. 죽기골은 온성수용소에서 남동쪽을 수km 떨어진 곳이었는데 서로 다른 세 수용소와 연결된 지역이었다.

죽기골에는 국가안전보위부 제3국(일명 예심국)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인근 수용소로부터 정치범들을 받아 조사하거나 수용소에서 보내오는 물자를 받아 관리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처음 신병 때는 그곳이 단순히 정치범을 예심(초기 취조)하는 곳으로 알았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1988년 여름 제13호 관리소 3중대(방한령 초소) 순찰병 2명이 순찰을 나갔다가 길을 잃어 죽기골에 잘못 들어간 사건이 있고부터다.

이 사건으로 수용소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수용소 소장과 경비대 대대장이 죽기골 관리책임자에게 굽실거리며 「각서」까지 쓰고 손이야 발이야 빌고 또 빈 후에야 순찰병을 겨우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이후 경비대 대대장은 경비병들을 모아놓고 『절대로 죽기골 근처에는 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같은 해 함북 새별(옛 경원)군 식료공장 지배인과 여직원이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종성으로 왔다가 길을 잃어 죽기골에 들어간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곧바로 체포됐고 여직원은 인체실험용으로 이용된 뒤 죽었고, 지배인은 그곳 청소부로 있다가 심장파열로 사망했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그때부터 「죽기골」은 일반인들은 물론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원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죽기골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높아져만 갔다. 세월이 지나면서 고참들로부터, 또 나 자신이 직접 그 근처를 지나다니면서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둘 더 보거나 듣게 됐다.

그곳에 근무하는 보위원 가족들은 모두 집이 평양이며, 보위원 신분이지만 실상은 모두 의사라는 것, 각자가 모두 수용소 소장에 준하는 예우를 받고 있으며, 명절 때에는 전원 김일성부자로부터 선물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북한에서 정치범수용소 소장이면 그 위세는 대단하다. 그런 소장조차도 죽기골 직원들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절절매니 그들이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지는 짐작할만 했다.

상관들로부터 국가안전보위부 제3국은 그냥 「예심국」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생체실험과 생화학실험을 하는 곳이며 내부 시설은 지하터널 안에 건설돼 있다는 말도 자주 들었다. 죽기골에서 나오는 트럭은 러시아제 지르(GEL)였는데 적재함은 시커먼 군용천으로 덮여 있었으며 주로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이 자동차는 경비들 사이에서「까마귀차」로 불렸는데 이는 곧 죽게 될 사람들을 나르는 차를 빗대 부른 말이었다. 이 「까마귀차」는 수용소에 들어와도 아무런 검문검색도 받지 않았다. 신병이 뭣 모르고 차를 세웠다가 수용소 소장에게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다.

많은 정치범들이 「죽기골」에 끌려갔는데 살아나온 사람이 없었다. 경비병도 잘못 들어갔다가 죽을 뻔 했는데 정치범이야 원래 산 목숨이 아니니 죽기골에 들어가서 살아나오길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970년대 초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국가보위부장 김병하가 정치범수용소에 별장을 하나씩 만든 뒤 20대의 여자정치범(정치범가족)을 목욕시켜 소위 「기쁨조」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는 이들 「기쁨조」를 불러 놀다가 만족스러우면 살려보내고 조금이라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저년 3국으로 보내』라고 했다는 것이다. .

김병하는 김정일이 등장한 이후 그에게 밉보여 숙청된 뒤 사라졌고, 그 친인척들도 모두 수용소로 추방됐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죽기골은 1990년 초 정치범수용소의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없어졌다. 전해인 1989년 온성수용소에서 정치범들이 폭동을 일으켜 많은 정치범과 보위부 가족이 희생되는 사건이 터졌고, 중국 개혁ㆍ개방의 여파로 유사시 적들과 연합한 제2전선 형성에 대한 우려 등으로 국경지역에 집중됐던 수용소 세 개중 두개를 폐쇄했던 것이다.

이때 보위부 제3국은 함북 화성에 있는 제16호 관리소 근처 만덕산 골짜기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근무 인원과 살아남은 죄수들이 먼저 철수하고 죽기골의 지하시설과 모든 건물은 폭파됐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무참하게 모든 건물을 파괴시켜 버렸는지 모르지만, 아마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되는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어있지 않았을까?

최근 국제사회에서 떠드는 생체실험같은 것, 내 눈으로 생체 실험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은 없으니까 그곳이 생체실험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그곳이 어떤 곳이었다는 것쯤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건물이 모두 폭파된 후 모든 뒤처리는 수용소 경비대에 맡겨졌다. 그 무시무시했던 죽기골을 처음 밟는 순간이었다. 종성노동자구에서 남동쪽으로 차로 30분가량 산속으로 들어가니 천연요새와 다름없는 지형이었다. 모든 것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파괴돼 있었다.

나와 동료들은 이미 철수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공포에 질려있었다. 철거작업을 하는 군인들 중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무슨 소리라도 했다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철거작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이가 제일 많은 분대장이 『야~, 3국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왜들 다 얼어 있어?』하고 말문을 떼자 그 때서야 병사들이 입을 열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치범수용소 자체가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말살하는 반인륜의 현장이었다. 그런 수용소도 진저리를 치는 공포의 죽기골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대명천지에 이런 곳이 존재할 수 있다니 아연할 뿐이었다.

나는 현역 군인으로 자동보총, AK소총 2정과 권총 6자루를 무기고에서 탈취하고 목숨을 걸고 수용소에서 빠져나온 뒤 국경을 넘었고, 천신만고 끝에 여기 자유대한에 안착했다. 동료들이 나를 잡으려고 두만강까지 추적해 나왔지만 다행히 교전은 없었다.

여기 와서 이런 사실을 우리 정보당국에 소상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국가보위부 제3국」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 정보당국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반인륜범죄는 반드시 그 진상이 밝혀져야 하고 특히 국가보위부 3국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통일 후 꼭 밝혀야 한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