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3월 30일 황해북도 탁아소에서 식량난으로 먹지 못해 힘없이 누워있는 북한어린이 모습. /AFP연합 사진제공

자식들이 부모 목 매단 '엽기사건'도

함흥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탈북전까지 쭉 살아온 제 2의 고향이다. 동해와 함주벌, 큰 공장이 밀집한 함흥은 예전부터 몇 안되는 살기좋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벌어진 어이없는 집단 아사의 악몽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북한의 식량난은 1990년 초부터 시작돼 김일성 사망과 함께 본격화 됐다. 1994년 북한의 ‘영생교주’인 김일성이 죽자 여기저기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하늘의 저주였는지 공교롭게도 때맞춰 식량배급도 끊기기 시작했다. 함흥시는 공장 밀집지역이어서 대부분 주민들이 배급에 의존하고 있었다. 처음 1년간 지연과 중단을 되풀이하던 배급소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밀린 배급만이라도 받기를 고대하는 주민들로 북적거렸다.

그렇게 1년이 지나 1995년이 왔다. 직감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의복 재단기술이 있어 사람들의 옷을 지어주고 근근히 입에 풀칠을 해왔기 때문에 비싼 장마당 쌀이라도 사먹을 수 있었지만 배급이 아예 끊긴다면 사정은 달라지는 것이다. 뭔가 대비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아니나 다를까 1995년 후반부터 배급이 완전히 끊겼고 밀린 배급이라도 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주민들의 기대는 절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함흥역에는 세수도 못한 꽃제비들이 수십 명씩 몰려다니며 구걸하고 있었고, 군데군데 길 가에는 굶주린 노인들이 맥없이 누워 있었다. 대량 아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영실’(영양실조의 줄임말)이라는 단어가 본격 유행하게 됐다. 군복입은 군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실군’에 ‘영양실조군대’까지 생겨났으니 말이다.

‘영실’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은 본격적인 식량난이 오기 이전인 1990년대 초부터로 짐작된다. 1995년부터는 영실에 이어 ‘강영실’이라는 새로운 은어가 유행했다. ‘강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널리 통용됐다.

“동무, 강영실인가?”라는 물음은 “강한(심한) 영양실조에 걸렸는가?”라는 질문의 다른 표현이었다. 대개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처참한 몰골로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들을 다소 낭만적으로(?) 그렇게 부르곤 했다.

나는 그때 인민반장을 하고 있었다. 함흥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반정부 성향이 강해 보위부와 보안서의 통제가 매우 심했다.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서의 지시를 받는 인민반장은 북한 사회의 저변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우리 인민반은 25가구로 약 80명 정도 됐었다. 인민 반장의 임무는 25가구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과 정체가 불명한 사람들의 내왕, 투숙을 감시하고 파악해 수시로 보위부와 보안서에 보고하는 것이다. 또한 당의 지시 내용을 신속하게 해당 주민들에게 알리는 일도 인민반장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때문에 식량난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우리 인민반 25가구 가운데 옥수수밥이라도 먹는 집은 5가구에 불과했고, 초근목피로 세끼 죽먹는 집이 10가구, 두 끼 겨우 죽 먹는 집이 5가구, 나머지는 죽는 날만 기다리는 집이었다. 우리 인민반은 그나마 살만한 동네였기 때문에 희생이 적었지만 사포구역과 용성구역 같은 일반 노동자 밀집지역엔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1996년이 되자 사회가 거의 무정부상태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성천강구역의 ‘삼일장’, 회상구역의 ‘평수장마당’, 사포구역 ‘사포장마당’, 동흥상구역의 ‘함주장’ 등 함흥시내 구역마다 장마당엔 인파로 넘쳐났다. 장마당에 가야 하다못해 먹을 것이라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장마당 곳곳에서 꽃제비, 노인, 망나니, 장사꾼들이 어우러져 서로 치고 받고 싸우고 빼앗고 짓밟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그때만 해도 공산품 장사는 모두 불법이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벌이는 장사는 필사적이어서 매일처럼 벌어지는 단속에도 전혀 줄어들지 않고 날이 갈수록 확대돼 갔다.

장마당에는 3일에 한번씩 ‘폭풍’이 몰아쳤다. 보안서의 집중 단속을 상인들은 ‘폭풍’이라 불렀다. 보안원이 떴다 하면 장사꾼들은 팔던 물건을 감추고 쥐새끼처럼 재빨리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동작이 굼뜬 일부 상인들은 붙잡혀 물건을 압수 당하고, 아낙네들은 고래고래 악을 쓰며 욕지거리를 해댔다. 예전 같으면 보안원에게 대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폭풍’은 예정에 없이 일어났다. 특히 보안서 직원 가운데 부모 회갑이나 간부들의 회식이 있는 날이며 어김없이 ‘폭풍’이 일어났다. 이런 날이면 주민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몸을 사렸다. 결국 권력기관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장마당을 급습해 주민들의 물품을 수탈하기 위해 ‘폭풍’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어느덧 단속하는 보안서 요원에게 ‘오빠시’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오빠시는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북한영화에 나오는 악질 일본순사의 이름이다. 어찌나 악독하고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던지 북한 주민들 치고 오빠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죽하면 주민들이 단속경관에게 오빠시라는 별명을 붙였을까.

1996년 봄 어느 날 아침 함흥 역전에 나가보니 6명의 어린 아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자는 아이들인가 싶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죽은 아이들이었다. 너무 섬뜩하고 처참했다. 전쟁터도 아닌데 길가에 죽은 아이들이 널브러져 있다니….

얼마 안 있어 보안원들이 자동차를 몰고 나타났다. 좀 키가 크고 힘께나 있어 보이는 꽃제비 몇몇에게 먹을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애들을 차에다 싣게 했다. 아이들은 마치 죽은 짐승을 만지듯 시신을 자동차에 집어 던졌다. 너무나 앙상하고 파리해서 사람의 시체처럼 보이지 않았다. 함흥시 교외 평수리라는 곳에 사람들을 파묻는 집단 매장지가 있었다. 거기엔 얼마나 많은 아이들과 노약자들이 이름 석자도 남기지 못하고 묻혀버렸는지 알지 못한다.

1997년이 되자 식량난이 극에 달해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비료공장에선 노동자들이 창고를 털어 훔친 비료를, 기계공장에서는 공장 부속품과 전동기 등 돈이 되는 것은 모두 뜯어 팔기에 바빴다. 이러한 약탈이 계속되자 공개처형이 하루가 멀다하게 일어났다. 여기저기에서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본의 아니게 강도가 되어 버린 주민들을 사형에 처했다. 충격요법을 쓰는지 하루는 몇 명의 주민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총으로 난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흉흉한 일이 계속되는 가운데 1997년 봄 회상구역에서 자식들이 부모를 죽인 엽기적인 사건까지 발생했다. 조모 할머니는 아들과 딸 두 명을 출가시키고 혼자 사는 노인이었다. 식량난으로 당장 굶어죽게 되자 할머니는 있는 재산을 모두 털어 음식을 차리고 자식들을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나서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면서 혼자 살기 힘들다고 푸념을 했는데 모두 제 살기 바쁜 자녀들이 누구도 어머니를 모시려고 하지 않았다.

절망한 할머니는 모처럼 너희들이 왔는데 창고에서 키우는 개를 잡아야겠다며 자식들에게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창고 안에서 개 목을 맬 테니 너희들은 밖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면 된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창고로 들어간 후 밧줄이 바깥으로 내던져졌고 빨리 당기라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식들은 그 밧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자녀들이 창고로 들어가 보니 그들이 잡아당긴 밧줄에 목을 걸고 있는 것은 개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어머니였다. 이 사건은 당시 함흥시에 크게 소문이 퍼졌고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런 엽기적인 사건이 터지자 함흥시의 민심은 더 흉흉해졌고 다들 정말 나라가 여기서 끝장나는가 보다 했다. 여기저기서 악에 바친 인민들의 반항 섞인 불만이 쏟아졌다. 1998년 강화동 배급소에서 한 여자가 배급소에 나왔다가 여전히 배급을 주지 않자 “전쟁이나 콱 일어나 버려라”고 고함을 지르다가 보위부에 연행돼 행방불명됐다. 장마당에서 “지금은 일제시대보다 더 못하다”고 불평하던 노인이 귀신도 모르게 사라졌다. “평생 배급을 기다리다가 머리가 다 희어졌다”고 한마디했던 할머니는 보위부에 끌려가 혼쭐이 났다.

“시어머니는 염소(염소처럼 많이 먹는다), 아버지는 됫박(일은 안 하면서 됫박 채로 먹는다)”이라는 말도 유행됐다. 1997년부터 소머리와 말머리가 그려진 옥수수 부대가 외국으로부터 들어와 장마당에서 팔리기도 했다. 주민들은 싼값에 너도나도 이 옥수수를 사먹었는데 알고 보니 사료용 옥수수였다. 이때부터 ‘주체돼지’라는 말이 또 유행했다. “외국 사료를 주체조국 인민이 먹고산다”는 야유 섞인 말이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인민보안서의 간부를 통해 1994~1997년까지 함흥에서만 5만 명의 주민이 굶어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8비날론공장에서만 1000명의 노동자가 굶어죽었다고 하니 그 가족까지 합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식량난 초기에는 집과 가재도구를 모두 팔아 겨우 연명했지만 1996~97년에는 그마저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꼼짝없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보태주는 친척도 없고 생활력이 약한 북송교포들이 가장 먼저 죽기 시작했고 고지식한 학자들과 노동자들이 차례로 굶주림에 지쳐 쓰러졌다. 결과적으로 노동당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산 사람들은 다 굶어죽고 당의 지시와는 반대로 장사를 한 사람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반룡산 중턱 김일성동상 주변에 나무라고 생긴 것은 모조리 뽑아다 불을 땠기 때문에 공원이 민둥산으로 변했다. 화장실 문까지 뜯어다 불을 때 문이 제대로 붙어있는 것이 화장실이 없었다.

1999년 들면서 아비규환은 강제로 진정되기 시작했다. 굶기 직전까지 갔던 인민보안서와 보위부며 군대에 곡식이 공급되기 시작했고 완전히 무너졌던 사회시스템도 하나 둘 복원되기 시작했다. 이 즈음 해외 지원식량이 굉장하게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민들한테는 유엔 사찰단이 지나가면 주는 흉내만 내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니 아마 권력집단으로 모두 가는가 싶었다.

뒤로 빼돌려지는 지원물자들이 장마당으로 대거 유통돼 ‘빽’을 가진 자들은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다. 외부 지원물자가 많아지기 시작하자 식량가격도 떨어졌고 최악의 1997년에 비하면 2000년대에 들어서는 많이 나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굶주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생존경쟁에서 도태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저세상에 갔기 때문에 그야말로 ‘독종’들만 살아남아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당의 지시를 반대로 이행한 사람들이고, 당을 믿지 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한 사람들이다.

요즘 북한이 변화한다고 자꾸 떠드는데 현재 북한의 시장은 이미 1995년에 활성화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2002년의 7.1 조치란 것도 북한당국이 체제유지를 위해 시장의 상황을 사후적으로 인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 지난 이야기를 지금 하는가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곳 남한에 와보니 전쟁보다 더 참혹했던 1990년대 후반의 북한 현실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기 때문이다. 거리에 널린 시체들과 뼈만 남은 사람들, 아비규환의 1990년대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처참했던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이 북한판 집단아사의 악몽을 적어도 피를 나눈 우리 형제들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동포애도 민족애도 다 좋다. 하지만 수백만 인민을 아사로 내몬 김정일 집단은 우리 민족도 동포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정부와 국민은 똑똑히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그들 집단은 인민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한 줌도 안 되는 자신들의 권세가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김영순·67·전 함흥시 동흥산구역 운흥1동 인민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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