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순(68) 전 함흥시 동흥산구역 인민반장

북한은 선군정치를 통해 외형은 군대가 지탱하지만 내부는 「인민반장」이 지킨다.

남한의 동(洞) 아래 반(班)에 해당하는 인민반을 책임진 인민반장은 주민을 감시하는 제1일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변변한 데모 한번 일어나지 않고 주민들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처져 있는 감시망 때문인데 인민반장이 그 감시망의 1선을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안전보위부의 눈과 귀의 구실을 한다. 인민반을 알면 북한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함흥시 동흥산구역 운흥1동에서 인민반장을 지냈다. 운흥1동에는 48개의 인민반이 있고 한개 인민반에는 대략 30가구가 속해 있다.

평양시의 인민반장은 월 70원의 월급을 받는 유급반장으로 각종 혜택까지 받는다. 대신 주민감시자로서 지방보다 더 엄격하게 주민들을 통제해야 한다. 함흥시의 인민반장에게는 월 30원이 지급된다.

평양시의 경우 인민반장의 고발에 의해 주민이 지방으로 쫓겨날 수도 있어 인민반장의 위세가 제법 높은 반면 지방 도시는 평양만 못하다.

행정체계상 인민반장의 직속 상위기관은 동사무소, 구역(시/군) 인민위원회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시는 국가보위부, 인민보안서로부터 하달받으며, 인민반장은 이들과 아주 긴밀하게 연계돼 있다.

국가안전보위부가 해당 인민반에 낯선 사람이 숙박하거나 들락거리는 경우, 라디오 듣는 자 등 수상한 자들과 그들을 접촉하는 가구에 대한 정보를 요구한다.

지방 경찰기구인 인민보안서도 무직건달자, 경제적으로 수상한 자 등 특이 동향을 보이는 자에 대한 면밀한 감시와 보고를 요구한다.

인민반장은 매일 아침 한 시간씩 동사무소에 들러 주민동태를 보고하고 새로운 과제를 받은 뒤 집으로 돌아온다. 또한 일주일에 한두 번씩 보안서에 나가 과업수행 상황을 보고하고 새로운 과제를 받는다. 보위부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접촉하게 된다.

인민반장은 출신성분이 아주 좋은 사람도 있지만 성분에 다소 흠집이 있는 사람들도 기용된다.

이는 성분에 하자가 있는 사람일수록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어 주민감시에 유용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반장은 일상적으로 누구네 집에 이불이 몇 채이고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다 꿰고 있어야 한다. 물론 인민반장을 감시하는 사람도 따로 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인민반장이 보고를 게을리 하거나, 엉터리 보고를 했다가는 금방 탄로가 난다. 보위부에는 수시로 특이사항을 종이에 써서 투고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돼 있기도 하다.

인민반장은 행정체계상 최하부 말단 조직의 책임자에 불과하지만 유사시 엄청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의 말 한마디가 한 가정의 운명을 바꾸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웃 인민반에선 한 북송교포가 밤마다 라디오를 듣다가 인민반장의 신고로 산간오지로 추방된 일도 있었다. 인민반장이 하기 따라 소속 인민반 주민들의 일상이 고달플 수도, 편안할 수도 있는 것이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전까지는 인민반 감시가 먹혀들고 인민반장의 말에 제법 날이 섰지만 섰지만 식량배급이 끊기면서 장사가 활발해지자 인민반장의 위세로 한풀 꺾였다.

종전 같으면 「반동」으로 몰릴 수 있는 말도 함부로 내뱉기 일쑤였다. 배급을 못받아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불평불만을 제다 보위부에 일러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인민반장이 해야할 일은 참으로 많다. 그 중에서도 인민반별로 내려지는 파철ㆍ파병ㆍ파지 수집과 수매, 농촌에 보낼 분토(인분을 말려 흙과 섞은 거름) 생산과제는 지금 생각해도 골치가 지끈거릴 정도다. 한 겨울에 집집마다 30kg씩 분토를 생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쟁이 따로 없다.

먹지 못해 죽을 지경인 주민들이 배변을 한들 얼마나 하겠는가. 먹는 것이 없으니 나오는 것도 없는 화장실을 박박 긁어 인분 확보를 위한 전쟁이 벌어진다.

동네방네 인분 말리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했다. 동마다 「인분확보경쟁도표」까지 만들어놓고 인민반별로 경쟁을 시키니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진 과제이니 만큼 어떻게든 과제는 수행해 놓고봐야 한다. 그러자니 인민반장은 날마다 신발이 닳도록 주민들을 닥달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이 변해 무직건달자, 여기 말로 하면 실업자가 많아졌다. 직장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 보안서에서 그들을 잡아간다. 이렇게 되면 당사자가 인민반장이 고발해서 잡혀갔다가 생사람을 잡는다.

나중에는 미리 무직건달자의 집에 가서 『보안서에서 언제 검열 나오니 그때까지 직장에 적을 걸어놓으라』고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어야 했다.

담당 보위원이나 보안원을 적당히 삶아놓고, 술이랑 담배 등을 수시로 바치면서 인민반에서 제기되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주니 우리 인민반은 비교적 평탄해 보였다.

하지만 인민반장이 융통성 없고 사상이 투철해 마구 고발하는 인민반은 항상 벌집을 쑤셔놓은 듯 했다.

매일과 같이 싸움이 일어났고, 보위부와 보안서의 급습을 받아 라디오의 주파수가 제대로 고정돼 있는지를 검열받고, 불온서적이 없는가 가택수택도 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민반장과 그 집은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인민반장도 너무 혁명성을 발휘하다가는 자신이 제명에 못 죽을 수도 있다. 그만큼 사회가 많이 변하고 삭막해진 것이다.

우리 인민반에는 1988년에 자진 월북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북한에 와서 결혼한 김원식- 유설자 부부였다. 두 사람은 어느 운수회사 사장과 사원 사이였다고 한다.

나이 차이가 20년 가까이 나는 것 같았는데 회사가 부도나자 해외로 나갔다가 입북한 것이라고 했다. 둘 사이에는 9살난 딸이 하나 있었다.

남편은 조국전선 위원회에 소속돼 있다가 퇴직해 집에서 놀고 있었다. 그들은 감시대상 1호이기도 했다.

인민반장 외에는 누구도 그 집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괜히 친한 척 했다가 나중에 무슨 혐의를 뒤집어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당국의 배려는 극진했다. 당시엔 전기가 모두 끊기고 배급은 아예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월북자의 집은 특별전기가 공급됐고, 배급도 월 54kg씩 정상적으로 공급됐다.

집도 동네에서 괜찮은 집을 배정받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세 식구 모두 구멍난 양말에 팔꿈치가 뚫린 내복, 그것도 한국에서 입던 옷을 그때까지 입고 있었다.

월북자라 석탄불도 땔 줄 모르고 해서 모두 전기로 밥을 하는데, 하루는 누군가 『너만 잘살지 말고 돈을 내놓으라』는 협박장을 그 집으로 보내와 보위부와 보안서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범인은 잡지 못했다.

나는 무릎이 터진 남조선 내의를 입고,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고 마음 속으로는 『지옥구덩이로 스스로 기어든 바보』라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서로 믿지 못해 속내를 주고받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도 후회하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월북자는 물론, 비전향장기수라고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직접 북한생활을 경험하면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북한의 실정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곳에 살아보지 않고서는 아무리 설명해도 모를 것이다. 인민반장은 그나마 공개된 사람들이지만 보위부의 특별임무를 받고 일반 주민들을 감시하는 밀정들은 그 수가 얼마이고 누군지조차 알길이 없다.

남한에 와보니 감시자가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편안하고 살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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