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가명) 전 인민군 4군단 26사단 대위

내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에 입대해 처음 배치된 곳은 휴전선과 가까운 서부전선 4군단 26사단이었다. 여기서 나는 사병으로 10년 복무한 뒤 장교로 선발돼 전부 14년간을 근무했다.

이곳은 임진강과 예성강, 한강의 물이 바다로 유입되는 곳으로 넓은 뻘이 남과 북을 가로막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강화도가 바라다 보이고, 맑은 날이면 쌍안경으로 멀리 서울까지도 어슴프레 보였다.

육지가 맞닿아 있는 최전방은 민경부대가 경비를 맡고 있지만 넓은 강과 뻘이 펼쳐져 있는 전선은 26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는 아예 없어질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포탄이 장전돼 있고 특히 152미리 자주포는 서울도 사정권에 두고 있다.

전방은 대포가 남쪽을 향해 빼곡이 들어차 있으며, 지하갱도에는 번쩍거리는 포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그야말로 화약고인 셈이다. 게다가 민간인들은 거의 없고 수만 명의 군인들만 득실댄다.

전방의 모든 화포는 「직일포」(24시간 장전상태에서 명령만 기다리는 포)로 불린다. 저마다 특정 목표물을 겨냥하고 있지만 포병부대의 기본 전략은 「빗자루전술」에 종속돼 있다. 목표지역을 빗자루로 쓸 듯이 초토화시켜 버리는 단기 전략에 집중돼 있는 것이다.

고된 신병교육을 마치고 처음 부대에 배치됐을 때는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병영생활에 적응해 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남녘에서 날아온 「물건」과 그것 때문에 빚어진 사건들이다. 이 일은 오직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던 나의 마음을 뿌리째 흔들어 버렸다.

전방에는 이른바 『적들의 선전물』이라 불리는 「적선물」이 많이 날아온다. 삐라나 빵ㆍ초컬릿ㆍ라면ㆍ등 음식물과 치약ㆍ비누ㆍ면도기ㆍ수건ㆍ장갑 등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들이 대량으로 날아오곤 했다.

인민군 보위사령부(정보부대)는 『적들의 물건은 독이 묻어있어 함부로 만지거나 먹었다가는 바로 살이 썩어들어 가거나 목숨을 잃는다』,『적선물 안에 폭탄이 장치돼 있어 만지면 폭발한다』고 엄포를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하루는 한밤중에 비상소집 사이렌이 울렸다. 전쟁이라도 일어났나 싶어 잔뜩 긴장한 채 완전군장을 하고 뒷산 소나무 숲에 도착해 전투태세에 들어가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날이 밝으면서 진상이 밝혀졌다. 적선물을 매단 풍선이 부대 뒷산 소나무 가지에 걸려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진 것이었다. 『강한 폭발물이 장착돼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므로 아무도 손을 대려하지 않았다.

중대장이 한 병사에게 소나무에 걸린 것을 끌어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병사가 마지못해 다가가 풍선을 내리는 순간 일부는 멀찌감치 피하고, 일부는 그 자리에서 납작 엎드리며 귀를 막았다.

그러나 풍선을 완전히 바닥에 내려놓았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대장은 병사들을 돌아보며 『훈련할 때는 어질어질하더니(굼벵이처럼 느려 터졌더니) 이럴 때는 번개 같구만?』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에 병사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풍선에 매달려온 함에는 라이터ㆍ목욕수건ㆍ비누ㆍ야구공ㆍ축구공ㆍ사탕ㆍ과자 등에다 심지어 여성 속옷까지 별별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이런 것들을 처음 보는 병사들은 낯선 물건들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이튿날 아침 부대 보위부장이 나타나 무슨 간첩이라도 잡은 것처럼 어깨에 잔뜩 힘을 주더니 군인들을 불러모아 놓고는 『어젯밤 적선물을 모두 소각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며 상부의 명령을 전했다.

적선물을 모아놓고 막 불을 지르려는 순간 중대장이 불쑥 한마디 던졌다. 『중대에 하나 남아있는 축구공이 낡아서 학교에서 빌려 차곤 했는데 저기 적선물 가운데 축구공을 좀 쓰면 안되겠습니까?』 하고 보위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동무, 정신 있소? 어버이 수령님의 교시학습도 안했나? 김정일동지께서는 적들에 대한 환상과 숭배는 자본주의 나라 물건에서부터 들어온다고 하시었소. 물건에도 사상이 있단 말이오. 적들의 사상?. 당장 비판서를 써서 연대 보위부로 올라오시오.』

축구를 좋아하는 병사들을 위한답시고 한마디 한 것이 엄청난 실수가 되어 당장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보위부장에게 손이야 발이야 빈 끝에 겨우 용서를 받았다. 아마 성질 나쁜 간부에게 걸렸더라면 크게 경을 칠 뻔했다.

나는 그때 보위부장이 한 말을 아주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김정일을 비롯한 노동당 간부들이 타고 있는 승용차는 모두 「벤츠」, 김정일이 간부들에게 해마다 선물하는 명함시계(김일성 김정일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는 「오메가」ㆍ「랑코」 등 모두 외제품이 아닌가.

백화점과 외화상점, 고급식당에서는 예외 없이 외제만을 취급하며, 외화가 아니면 아예 구경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김정일과 당 간부들 전체가 외제에 푹 파묻혀 버렸는데 무슨 축구공에 사상이 있다고 저 야단인가.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때부터 내 눈에는 북한사회의 모순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식량난으로 나라 전체가 흔들렸던 90년대 후반에는 식량은 물론 비누ㆍ치약 등 초보적인 생필품조차 공급되지 않았다.

병사들은 적선물인줄 알면서도 비누나 라이터, 사탕, 과자 등을 몰래 숨겨놓고 쓰거나 먹곤 했다. 그 중에서도 수건이 가장 탐이 났는데 워낙 남조선 제품이라는 게 티가 나 쓸 수가 없었다.

입대 전 고향에 있을 때는 남한에 대해 이렇다할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지만 전방부대에 근무하면서 궁금증이 솟기 시작했다. 전방의 고사포에는 명령하달의 신속성을 위해 라디오를 부착했는데 이를 통해 가끔 남한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장교가 된 다음부터는 KBS 등 남한의 여러 TV 프로그램을 보기도 했다. 전방이라 말소리나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아무도 없을 때는 잠깐씩 고정된 채널을 풀어 보곤 했다. 이런 행위가 발각이라도 되는 날이면 바로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덩이처럼 부풀어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르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던 것 같다. 요즘은 그 때처럼 적선물들이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 같지 않다.

이제 북한을 떠나온 지도 수년이 지나갔다. 90년대 후반 다 망해갔던 북한정권, 특히 군대가 외부지원으로 겨우 살아난 것 같다. 외부지원이 그런 식으로 되풀이된다면 진정한 평화를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무지막지한 독재정권의 군대인 인민군의 힘을 약화시키고 주민들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 있는 대북정책을 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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