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평양이지만 탈북 직전에는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새별군(옛 경원)에서 살았다. 지금은 중국의 개혁ㆍ개방으로 중국물건이 싼값에 물밀듯이 들어와 예전보다는 살기가 좋아졌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출신성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 추방돼 어울려 사는 「귀양지」였다.

어머니는 6.25때 서울에서 의용군에 입대해 월북했고, 나중에 의사가 됐으며 나도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함흥약대를 졸업하고 약사가 됐다. 남한 출신이라는 「멍에」때문에 극심한 천대속에 우리 가족은 평양에서 멀리 새별군으로 쫓겨갔다. 나는 새별군 하면탄광 병원 약사로 근무했다.

하면탄광에는 유난히 국군포로 출신들이 많이 살았다. 98년에 탈북한 국군포로 장문한씨, 유골이 되어 딸의 손에 들려온 백종규씨도 모두 하면탄광 출신이다. 쫓겨온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 당국의 관심과 배려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지역보다 생활여건이 아주 열악했다.

기초적인 항생제조차 없어서 고통 속에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면서 약사가 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특히 식량난 때에는 독풀을 잘못 뜯어먹어 퉁퉁부어 오는 환자들이 많았지만 해독제가 없어 죽어가는 그들을 멀거니 지켜봐야만 했다. 의사 자신도 약이 없어 손을 놓고 있을 정도이니 일반 주민들의 고통이야 더 말해 무엇 하랴.

식량난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1997년경부터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의료지원이 시작돼 우리에게도 한가닥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근의 온성군에서는 1998년부터 정체불명의 의약품들이 장마당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이 약들을 어렵게 구해와 의사들에게 내놓고는 치료해줄 것을 요구했다. 유엔과 국제사회에서 지원되는 의약품들이 몰래 빼돌려져 장마당에서 거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와 동구권의 의약품에 익숙해 있던 북한 의사들은 환자들이 가지고 온 서방의 의약품들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설명해 줄 수 없었다. 약은 말할 것도 없고 의료시설마저 미비한 병원에서 환자들이 암시장에서 구해온 약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의사의 신뢰는 거의 바닥에 떨어졌다. 오히려 환자들이 의사들에게 시장에서 구입해온 암목실린(Ammoxcilinum)은 감기와 폐렴에, 코트리목사졸(Cotrimoxasolum)은 세균성 감염 질환에 잘 듣는다고 설명주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8년 8월 병원 당비서는 병원 관계자들을 긴급 소집해 놓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 1주일 후에 유엔에서 사찰단이 온다는 것이었다. 『느닷없이 유엔 사찰단이라니 우리 병원하고 유엔이 무슨 상관이람?』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상부의 지시니 병원 안팎을 쓸고 닦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사찰단 도착 이틀 전 상급 기관으로부터 빈 장부 두 권을 올려 보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사찰단 도착 하루 전 그 장부가 되돌아 왔다. 듣도 보도 못한 물품 목록들이 장부에 나열돼 있었다. 식용유, 쇠고기통조림, 각종 의료기구들, 식량 등 유엔에서 보내준 날짜와 소비내역이 그럴 듯하게 적혀 있었다.

3명의 사찰단원 가운데 머리카락이 노란 백인 여성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장부를 보고 무엇을 확인했는지 몇 번 머리를 끄덕이다가 돌아갔다. 저녁에 탁아소에 맡겨놓은 아이를 찾으러 갔다가 또한번 놀라운 일을 발견했다. 아이들이 흰쌀밥에 명태국물을 먹었다는 것이었다. 산나물에 옥수수가루 범벅이며 멀건 죽으로 연명하던 아이들에게 갑자기 흰쌀밥에 명태국이라니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탁아소를 들러보고는 이내 쓴웃음이 나왔다. 구경도 못한 쇠고기와 어물 등 외국산 빈 통조림 깡통들이 탁아소 주위에 진열돼 있었다. 유엔 사찰단이 그리도 무서운 것인가? 처음 보는 빈 깡통들을 쌓아놓고 벌이는 연출이 실로 가관이었다.
사연이야 어찌됐든 그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물론 탄광지역의 어린이들이 팔자에 없는 쌀밥구경을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찰단이 다녀간 뒤 우리 병원에서는 유엔이 가져다준 약품을 공급받게 돼 의사들과 약사들을 대상으로 서방 약품들에 대한 기술교육이 진행됐다. 어린이들의 구충제인 네벤다졸, 해열제인 모틴(Mortin), 지사제, 진통제, 항생제, 산모들을 위한 빈혈치료제 등 다양한 약품들이 공급됐다. 북한에서 구충제는 물약으로 된 산토닌을 주로 사용했는데 간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울며 겨자 먹기로 이용했었다. 유엔에서 들여온 네벤다졸은 인기가 워낙 좋아 간부들과 병원 관계자들이 우선적으로 복용했고, 어린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은 없어져 버렸다.

서방 의약품에 대한 기술학습이 있은 뒤부터 환자들이 암시장에서 약을 구해와도 아는 척 할 수 있게 됐고, 처방도 해줄 수 있게 됐다. 어디에서 빼돌려진 것인지 병원에도 없는 약들이 장마당에는 마구 쏟아져 나왔다.

1985~1990년 생필품이 부족해지자 소위 「힘있는 자」들이 생필품을 국정가격으로 빼돌린 다음 암시장에 내다팔아 10배 이상씩 폭리를 취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더이상 빼돌릴 생필품조차 없게 되자 국제사회가 지원한 물품들을 뒤로 빼내는 새로운 풍조가 등장한 듯 했다.

유엔사찰단이 자주 온다는 소문 때문인지 얼마 뒤부터는 아예 아무 것도 안주고 장부만 날조하는 식의 막무가내는 조금 완화됐다. 즉 장부에 40~50%는 임의로 공제해 놓고 나머지 의약품만 공급해준 것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의가 있으면 즉시 공급이 중단되므로 장부에 적힌 물량 가운데 절반은 어디에 쓰였는지 알지 못한 채 거짓으로 장부에 기록하고 나머지 의약품을 타다 섰다. 아예 안 주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에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각급 병원에는 「4호물자」라 불리는 전쟁물자를 비축하는 창고가 따로 있었다. 경제난으로 약품들을 주기적으로 교체해주지 못해 못쓰게 되거나 폐기되는 군사용 의약품을 대체하기 위해 97년 초에 들어온 의약품 상당수가 4호물자로 비축됐다고 한다.

유엔에서 의약품이 전달되기 시작하자 병원에는 유엔의약품창고가 새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병원에는 「병원의약품창고」와 「4호창고」, 「유엔의약품창고」가 각각 생겨났다. 평소 4호창고에는 약품이 가득 쌓여있었지만 아무리 급한 환자가 와도 누구도 열지 못했다. 감히 전쟁물자에 손을 댔다가 무슨 경을 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유엔사찰단이 두번째 방문하면서부터는 처음하고는 많이 달라졌다. 그들도 지원품이 뒤로 빼돌려진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꽤 깐깐하게 검열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완벽한 세트장에서 연출하는 연극의 진상을 밝혀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들 때문에 어려운 아이들과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지원품의 혜택을 받게 되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번에 용천에서 대형폭발사고가 일어나 어린이들을 포함해 귀한 생명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국 곳곳에서 용천주민들을 돕는 온정이 쇄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뜨거운 동포애를 느끼면서 이러한 지원품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일었다.

북한의 의료체계는 완전히 붕괴됐고 초보적인 의약품, 의료기기조차 없어 원시적인 방법으로 환자들을 치료한 지 오래됐다. 워낙 아무 것도 없는 북한이어서 웬만한 지원은 사막에 물붙기나 다름 없다. 그냥 주는데 그치지 않고, 가능한 현장에서 제대로 분배되는지 감시하지 않으면 힘있는 사람들의 배만 불려줄 우려가 있다.

폐허가 된 용천과 영양실조로 찌든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그 참담함에 눈물이 나온다. 1990년 초부터 태어난 아이들은 이미 심한 영양실조로 한 세대가 망가질 위험에 처해 있다. 어린이들의 영양상태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다.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영양제와 비타민제, 우유제품 등 무엇이 정말 북한동포들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꼼꼼히 따져 실용적인 지원이 됐으면 한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어린이들만이라도 구원했으면 좋겠다.
/이혜경(여ㆍ39) 전 함북 새별군 하면탄광병원 약사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