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일 前북한 중등학교 교사

내가 태어난 곳은 함경남도 함흥시이다. 나는 거기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함남 함흥 의 성천강고등중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했다.

부모님이 일본에 사시다가 북한의 허위선전에 속아 1960년대 초 입북했으나 다행히 일본 친척들의 도움으로 가정형편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였다.

이런 평범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난 내가 평소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주변의 친한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다가 남한방송을 듣게 됐고, 얼마 뒤에는 남한영화를 보고 나중에는 남한의 드라마 테이프까지 돌려보다가 국가안전보위부의 그물망에 걸려든 것이다.

1995년부터 북한에선 대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을 때였다. 1990년대 후반은 기아와 아사가 전국적으로 보편화되다시피 해 함흥시 어딜 가도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때부터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북한에 대한 환상을 다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보위부가 나를 잡자고 수사망을 좁혀오니 앉아서 잡혀 죽느니 탈출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피눈물을 머금고 1998년 10월 부모ㆍ형제를 뒤로 하고 두만강을 건너게 됐다. 중국에만 가면 살길이 열리겠지 생각했지만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국경을 넘은 지 일주일쯤 지나 좀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吉林(지린)성 허룽(和龍)의 버스터미널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중국공안은 나를 허룽시 공안국에 유치시켰다가 다시 북-중 국경지역인 난핑(南平)에 위치한 중국 변방부대로 호송했다가 그 다음날 함북 무산군 칠성세관을 통해 다른 탈북자 15명과 함께 북송시켜 버렸다.

이미 나는 두려움과 공포에 정신이 나간 상태였고, 주변 대부분 탈북자들도 사시나무 떨듯 공포에 질려있었다.

무산군 보위부 유치장에 들어서는 순간 나에게 「민족반역자 새끼」ㆍ「죽어야할 새끼」로 불려졌고 잠도 안 재우고 각목과 각종 고문기구를 동원하는 매질 신문이 시작됐다.

무산군 보위부에서의 조사는 그나마 나은 편이였다. 이틀간의 조사를 마치고 15일 후에 함북 도보위부(청진)에서의 한달은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넘나들게 하는 지옥중의 지옥 경험이었다.

여기서 7일간의 조사는 차라리 목숨이 끊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감방 계호원(간수)들이 구둣발과 각목으로 나에게 뭇매를 안겼다.

북한 인민군 군화는 워낙 단단하게 만들어져 그것에 차이면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느낀다.

구둣발과 각목으로 얼마나 맞았는지 처음엔 살이 찢겨나가는 듯이 아프다가 나중에는 정신마저 몽롱해지더니 각목에 맞는 부위에 퉁퉁 소리만 날뿐 감각조차 없어졌다. 이때 매 앞에선 장사가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온몸이 피멍으로 얼룩졌고 살점이 뜯겨 옷이 피범벅으로 변했다.

초죽음 상태에서 신체검사라는 것을 하는데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길 때마다 좋은 옷을 입었다며 또 매질을 했다. 팬티까지 다 벗긴 후 감옥 구석에 무릎을 꿇려 앉히더니 또 구둣발로 나를 짓이기기 시작했다.

조사관에게 제때에 대답을 못한다고 매질하고, 정신을 잃으면 물통에 머리를 처넣고 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하곤 했다. 너무 맞아 온몸에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맞아도 제대로 불지않는다고 그들은 두 팔과 두 다리를 뒤로 비틀어 묶어놓고 조사실 천정에 거꾸로 매단 뒤 또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피가 머리로 쏠려 괴로워 버둥거리면 묶인 팔다리가 조여와 더 고통스러웠다. 짐승처럼 매달려 있자니 매 맞는 고통보다 짐승이 된 것 같은 모멸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이렇게 7일이 지나가니 인간이 아닌 진짜 짐승 같은 폐인이 되고 말았다.

11월 초겨울의 날씨라고는 하지만 북쪽의 추위는 무척 매섭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만신창이 몸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까지 찾아오니, 젊고 건장했던 내 몸은 말라 비틀어지고 죽기 직전까지 내몰리게 됐다.

도보위부에서 30일간 조사를 마치고 나는 함북 농포집결소에 이송돼 28일간을 구류됐다.

내가 정치범수용소로 가지 않고 단순 경제범으로 취급돼 비교적 가볍다는 농포에 간 것은 예전 남한 비디오를 함께 봤던 친구들이 함남 도 안전국장 아들, 도당 행정부장 아들 등 고위층 자녀들이 함께 연루됐기 때문이었다.

간부들이 자신들의 아들을 살리려고 나의 정치범수용소로 행을 면하게 해준 것이었다.

농포집결소에는 남자 60명, 여자 70명의 탈북자들이 수감돼 강제노동을 하는 곳이었다. 오전 6섯시부터 다음날 오전 3시까지 강제노동을 해야 했고 먹는 것이라고 콩찌꺼기로 만든 주먹밥이 고작이었다.

보위부 감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왔지만 매일 두세 명의 탈북동포들이 시체가 돼 가마니에 둘둘 말려나가 땅속에 묻혔다. 강제노역장 역시 사람 죽이는 도살장일 뿐이었다.

나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여서 집결소 구석에 앉아 죽을 날만 기다렸다. 오죽했으면 수감돼 있는 사람들조차 차라리 죽는게 낫지 않은가 혀를 찰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집결소 요원들이 사람들을 모두 앞 마당으로 불러세웠다. 나까지 모두 끌고 갈 정도니 무슨 큰일이 난 듯싶었다. 그때가 아마 그해 12월 초순 정도 됐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한 대의 지프차가 오더니 차에서 임신한 5명의 여성들이 내렸다. 내 처지도 짐승처럼 됐지만 임신부라 그랬는지 그들이 더 불쌍해 보였다.

그런데 농포집결소 소장이란 자의 변태적 야만행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해 나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그는 여성들에게 『조국을 배반한 것도 모자라 중국 씨종자까지 배왔으니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가 어디있겠는가』라며 어떤 심판을 받는지 똑바로 보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남북한 모두 소꿉 시절 즐겨하던 놀이인 말뚝박기(북한에서는 말 타기라고 함)를 여성들에게 시키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자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임신한 여자들을 허리 굽혀 늘어서게 하고 거기에 남자들이 차례로 올라타 마치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듯 두 발로 여성의 배를 힘껏 걷어차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농포집결소 소장의 개인적인 지시인지 아니면 상부의 지시인지는 알수 없지만 이런 일들은 어디가나 비일비재한 것 같았다.

북한 당국도 이런 야만행위를 모르는 척 눈감아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탈북자는 잡혀오는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니까….

남자들의 발길에 배를 차인 여성들은 그 자리에서 하혈하며 쓰러졌고 어떤 여성은 기절한 채로 질질 끌려갔다.

정말 북조선이 갈 데까지 가는구나, 아무리 죽여야 할 적이라도 최소한 지켜야할 인간의 존엄성이 있지 않은가.

김정일정권은 이젠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부패타락했으며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를 완전히 말살했기 때문에 이제 종말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나는 정말 기적같이 농포집결소에서 풀려났고, 다시 탈북해 지금은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현재 서울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 민족사에 이렇게 슬픈 역사가 언제 또 있었던가? 동족에 의해 무참히 유린당하는 또 다른 우리 형제의 참상을 과연 외면해도 괜찮은가?

남북한 간의 평화공존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정신 나간 반인륜적인 독재권력과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얼마 전에 어느 정당 관계자들이 탈북실태조사라는 것을 하고 돌아와 발표한 내용을 보고 정말 격분을 넘어 허탈한 심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탈북자는 경제적 이유든, 정치적 이유든 탈북하는 순간부터 「민족반역자」로 낙인된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내부규정에 의해 처벌의 강도는 달라질 수 있어도 그들이 겪는 야만적인 고문과 학대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반인륜적이다.

일부 학자들과 소위 진보단체에서 떠드는 「경제적 유민」이니 또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외국에 이민간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도 모자라 이들을 돕는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들을 조그마한 이익을 좇는 브로커로 매도하는 것은 김정일이 아무리 사람을 죽이고 억압해도 참고 견디라는 말밖에 안된다.

다행히도 남한 형제들이 외면하는 동안 외국의 양심적인 인사들이 탈북자문제에 관심을 가져줘 그나마 위안이 된다.

탈북자들에 대한 외면은 인권에 대한 외면이며, 이 죄악은 고스란히 남한 형제들에 되돌려지게 될 것이다. 역사는 악랄한 독재자를 반드시 정의의 심판대에 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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