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제목

그리스도교 - 지하교회

닉네임
NK조선
등록일
2013-10-29 16:10:10
조회수
491
◆ 북한 지하교회에 대한 증언

※ 이 내용은 1997년 탈북해 남한으로 온 최영주(61, 여)씨의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남한 분들 중에는 "이북이 비록 사회주의국가라고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인데 설마 종교가 없겠는가?" 하는 대답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TV를 보면 북에도 봉수교회 같은 교회가 있고 절도 있던데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막연히 생각하시는 분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북에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은 항상 억누르는 공포와 계속되는 생명의 위협 속에 내던져지는 것을 각오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올해 남한 나이로 62세(북한에서는 나이를 만으로 센다)인, 아들과 딸들 그리고 손자들을 둔 평범한 여성입니다.

해방 전에 저의 집안은 평안북도 피현에서 살았습니다. 피현군은 기독교도가 많기로 유명한 평안도에서도 선천, 평양, 의주와 더불어 특히 기독교도가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해방 전에는 거의 전 군민이 기독교나 가톨릭을 믿었다고 합니다.

저의 아버지도 교회의 장로였고 어머니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는 기독교 탄압이 본격화된 1947년에 오빠를 데리고 먼저 월남을 하셨고 어머니 언니들과 함께 어린 저는 뒤쳐졌었는데, 그것이 결국 기약 없는 이별을 만들었습니다.

북한에서는 1946년에서 1947년에 걸쳐 기독교에 대한 집중적인 검열과 검색,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본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셨던 어머니께서는 북한 당국의 집중적인 탄압으로 가지고 계시던 성경과 찬송가책들을 모두 빼앗기셨지만 결코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책은 모두 빼앗겼지만 중요한 것들은 전부 외어놓았기 때문에 믿음을 이어가는데 큰 곤란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 나이는 불과 7~8세였는데 어머니는 항상 "나쁜 짓을 하면 하늘에서 내려다 본다"고 말씀하시면서 저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일깨워 주셨습니다.

제가 나이가 차서 현재의 남편과 결혼을 했을 때 제 남편은 기독교도가 아니었습니다. 제 남편은 데릴사위로 막내딸인 저에게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함께 제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제 남편도 저와 제 어머니가 기독교를 믿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저의 집안이 기독교 집안인 것을 알게되었지만, 의사인 남편은 기독교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에서는 몰랐지만 저의 집안이 과거 기독교도였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문건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월남자 가족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남편은 의사로서 출세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북한에서도 의사라면 다른 사람보다 쉽게 출세할 수가 있는데 처가의 출신 성분 때문에 남편은 당원도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에서는 남편에게 '이혼만 해라 그러면 입당도 할 수 있고 출세도 보장해 주겠다"고 남편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자신이 고아출신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자식들은 차마 고아소리를 듣게 할 수 없어서 이혼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971년에 친정어머니께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남편에게 "살다 보면 삶이 급할(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 하나님께 기도하거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유언이 있은 후, 1987년의 일입니다. 이북에서는 매일 아침 출근을 하게 되면 먼저 김일성, 김정일의 사진이 든 액자를 잘 닦아서 관리하는 것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큰 실수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김일성의 사진을 닦다가 실수로 그만 액자를 떨어뜨려 깨트리고 만 것입니다. 북한에서 이런 실수는 전 가족이 숙청될 수 있는, 정말 중대한 과오에 해당됩니다. 남편은 그 일 때문에 3일동안 내내 울면서 자아비판서를 쓰게 되었는데, 그 때 어머니의 유언이 머리에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공개 자아비판을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공개 비판이 시작되면 그 처분에 따라 숙청을 당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병원에 갑자기 검열대가 들이 닥쳤습니다. 검열대라는 것은 남한의 감사원 같은 것으로 각 기업소나 공작소 등의 운영상태나 부패, 비리여부를 조사하는 기관입니다. 바로 병원 종사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그 검열대가 갑자기 들이 닥쳐 검열을 하는 바람에 병원에서는 남편의 과오에 대해서 처벌을 하지 못하고 15일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이라고 해서 어떠한 법규범보다도 위에 존재하고, 북한 주민 생활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마치 성경의 십계명과 같은 원칙이 있습니다. 이 10대 원칙을 위반하고는 북한사회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데 김일성, 김정일의 사진이 든 액자를 매일 아침 닦는 것도 이 10대 원칙에 의한 것입니다. 이 10대 원칙을 위반한 행위는 반드시 15일 이내에 그 처벌을 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갑자기 검열대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저의 남편에 대한 공개 비판이 연기되어 15일이 지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관련 범죄를 15일 이내에 처벌하지 않으면 그 처벌을 하지 않은 사람마저도 크게 처벌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천행으로 남편의 처벌 건은 공개화 되지 않았고, 없었던 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제 남편은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많은 남한 분들은 이렇게 철통같은 사회에서 북한의 지하교회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아마 궁금해하실 것입니다. 북한에서의 종교 활동은 앞에서 말한 1946-1947년의 대대적 탄압이후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1960년대 이후에는 해방 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쉬쉬하면서 혼자만의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실된 믿음은 아무리 혹독한 탄압이라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 집안의 경우 독실한 믿음을 가진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저의 믿음도 성년이 되어서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제 자신도 자식들에게 어려서부터 하느님에 대해서 넌지시 암시하기도 하였고 또 제가 집안에서 남몰래 새벽기도를 하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라났기 때문에, 자연히 신앙에 어려서부터 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옛날 노래라고 하여 찬송가를 비롯한 해방전 노래들을 남모르게 가르쳐 주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달고 오묘한 그 말씀]과 같은 찬송가나 [싼타루치아], [돌아오라 소렌토로] 등의 노래를 불러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어느 정도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한 후에, 아이들이 고등중학교에 올라가고 또 성인이 되고 난 후에 비로소 우리 집안이 원래 기독교 전통을 가진 집안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밝히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기 때문에 담담히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계속 유지해 왔던 다른 집안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믿음이 집안에 유지되도록 하였습니다. 북한에서의 지하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주로 가족을 기본 단위로 하여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의 경우는 대개 믿음을 같이 유지해 왔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지하교회를 같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아주 친한 친구사이인 경우에도 같이 신앙생활을 공유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친한 친구 사이이거나 해방 전에 믿음을 가지고 있던 친척과 이웃 간에는 이와 같은 아주 조심스러운 교류가 가능했고, 또 그 정도로 가깝지 않은 사이에서도 교인들 사이에서는 서로 내색은 하지 않아도 '아직도 믿음을 유지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서로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활동은 아주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아주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서 이러한 북한의 사정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극심한 경제난으로 사회가 이완되고 또 중국을 통해 남한 사정과 남한 선교사들의 활동소식이 전해지자, 저는 보지 못했지만 성경책이나 찬송가책들도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친한 친구들 중 일부는 남한의 선교 방송인 극동방송과 같은 기독교 방송을 몰래 듣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집은 단파라디오가 없어서 남한의 기독교방송을 직접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방송을 듣던 친구에게 성경말씀을 좀 적어달라고 부탁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로 적어서 문서를 넘기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친구는 글로 적어서 넘겨줄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친구가 기독교 방송을 듣고 성경구절을 종이에 베껴서 모자에 감춰 쓰고 놀러 와서는, 몰래 그 구절을 읽어보게 한 후 그 종이를 불에 태워버리는 방식으로 남한의 기독교 방송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1990년대 들어서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서 믿음의 숨통도 다시 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 사회의 특성상 전혀 믿음이 없던 사람이 새로 믿음을 가지게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습니다. 대부분은 해방 전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나 종교적 전통이 있던 집안사람들 중, 도중에 믿음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다시 믿기 시작한 경우입니다.

저의 집안만 해도 친정어머니를 모셨던 저의 가족만 계속해서 믿음을 유지했을 뿐 저의 언니들은 시집가면서 살기 바빠서 믿음을 포기했었습니다. 그전에는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길 뿐, 감히 언니네 가족들에게 믿음을 다시 권유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두 조카들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었던 것은 1990년 이후에나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유지해 왔던 저희가족은 1990년대 후반의 극심한 식량난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식량난 와중에서 가족의 굶주림을 면해주기 위해 사위가 구리선을 절단해 팔려다가 잡히게 되었고, 본보기로 총살당하게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극심한 식량난 속에서 저희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중국으로 탈출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더 이상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살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탈북 후 근 50년만에 처음으로 다시 성경을 접하는 감격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에 있을 때, 우리 북조선 사람이 처한 이 엄청난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게 늘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를 해왔습니다. 저와 제 남편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처절한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북녘 땅에서 고통받고 있는 인민들을 생각할 때 여기서도 다시 기도하게 됩니다. 부디 '평화통일'이 이루어져서 북에서 고통받는 형제들이 구원받기를…….
작성일:2013-10-29 16:10:10 203.255.111.242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함께하는 협력사
통일부
NIS국가정보원
국군방첩사령부
대한민국 국방부
외교부
이북5도위원회
사단법인 북한전략센터
  • 제호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 대표전화 : (02)724-6650,6523
  • E-mail : nkchosun@chosun.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지해범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kchosun@chosun.com
ND소프트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