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년간 미국과 아시아에선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설전(설전)이 오갔다. 본사는 창간 80주년을 기념, 유근일(유근일) 논설주간이 미국 학계의 대표적인 동북아 및 아시아 전문가인 에즈라 보겔 하버드 대학 교수를 보스턴에서 만나 97년 아시아 위기의 원인을 재점검하고, 그가 본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번 대담은 중·일 관계와 미국의 역할, 북한의 운명 등 동아시아의 위기와 도전을 진단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편집자

▲유=97년말 경제 위기 이전까지, 동아시아는 ‘떠오르는 용(용)’에 비유되곤 했다. 하지만 경제위기로 아시아는 추락하는 용이 됐다. ‘아시아 병(병)’으로까지 불렸던 추락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겔=과중한 부채가 국제 투자자들에게 위기 의식을 불러왔다고 본다. 당시 동아시아 경제 위기는 사회구조보다 금융구조의 취약성에 주요 원인이 있었다. 더 깊이 보면, 아시아권의 과잉생산이란 요인도 있다. 그러나 그 때 아시아 경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아시아를 떠났던 국제 투자자들은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채 아시아로 되돌아왔다. 이를 보면, 이들의 주장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시아 경제위기는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성공한 방식이, 발전된 단계에까지 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유=일부 서구 학자들은 근면성 등 아시아의 유교 덕목이 아시아형 자본주의 또는 아시아형 산업화의 원동력이었다고 칭송하다가,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가 97년 경제 재앙을 불러온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보겔=많은 외국인들은 아시아인의 근면성과 단단한 조직체를 높게 평가한다. 개인적으로 볼 때 문제는 완전히 근대화되지 않은 나라에선 인간 관계가 너무 압도한다는 점이다. 인간 관계가 비즈니스에 개입되는 심각했던 예가 인도네시아였다. 박정희(박정희) 대통령 시절 형성된 한국의 특정 재벌과 정치권의 유착 관계 때문에, 외국 투자가들은 한국에서의 공정 경쟁을 확신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유=후기 산업화 시대에는 박정희식 개발 모델이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고 보나?

▲보겔=한국 경제 모델은 변화되어야 한다. 박정희 모델은 지금도 초기 산업화 단계의 나라들에는 여전히 적합하다. 자원 집중을 통한 경제개발이 그것이다. 베트남,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에는 이를 따르라고 충고하겠다. 이제 한국은 국내총생산 등 주요 소득 구성이 산업 분야에서 서비스 분야로 옮겨가야 할 때라고 본다.

▲유=세계화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무엇인가?

▲보겔=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지만 다른 나라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특히 경제분야에서 미국은 IMF와 세계은행 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세계와의 협의와 적응에 노력해야 한다. 아시아 경제위기가 가라앉은 현재, 많은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에서 IMF가 적잖은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게 됐다.

▲유=이슬람권 국가들은 세계화로 인해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보겔=지난 100년을 보면 문화는 당연히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의 한국문화는 100년전 조선왕조 때와는 다르다. 근대화는 모든 나라들의 문화 자체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한국 근로자층은 세계화 자체보다, 세계화의 결과에 강한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세계화를 통해 부국(부국)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제3세계 국가는 더 가난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겔=세계화의 비용은 엄청나다. 세계 각국 경제 개방 자체가 위기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근로자들은 수출을 통해 부유해졌다. 세계 자유 무역이 없었다면, 그런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세계화로 인한 변화가 빠르고 강도가 높아 많은 사람이 위협을 느끼고 분노를 표시할 수 있다. 한국의 특수 상황은 아니다. 모든 나라의 노동조합이 세계화 추세에 적잖은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유=‘아시아적 병(병)’과 관련, 한국과 일본, 중국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보겔=3국 모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은 규제 완화가 절실하다. 일본 관리나 지도자들과 대화해보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잘 안다. 재정·금융 분야의 규제 완화와 개방에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며, 일본 은행의 악성 부채도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한국은 97년 이후 일본과 비교할 때 적잖은 성과를 거뒀지만, 대우사태에서 보듯 취약점이 많다. 특히 재벌과 정치권의 관계도 재정립해야 할 영역이다. 주룽지(주용기)총리 등 중국 지도층이 추구하는 개혁 방향은 대체로 옳다고 본다. 그러나 부패를 완전 방지하기에는 경제 수준이 너무 낮다. 또 다른 문제는 주택과 사회복지 분야의 민영화다. 정치체제가 경제발전에 지속적으로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유=21세기 동북아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가?

▲보겔=동아시아는 해외 투자자들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도록, 내부 절차를 보다 투명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위기가 닥쳐도 이들의 신뢰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동아시아에는 엄청난 역동성이 존재하며, 세계 경제의 성장을 주도할 것으로 믿는다.

▲유=중국은 군사 대국 반열에 오르고 있고, 일본은 이미 군사·경제 대국이다. 두 나라의 경쟁, 때론 반목과 적대감이 동아시아 안정에 엄청난 위협이 될 것 같다.

▲보겔=그래서 미국은 동아시아 안정을 위해 일정 역할을 해야 한다. 미국이 당장 동아시아에서 철수하고, 남북한간 군사 긴장이 높아지고, 어느 한쪽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동아시아는 군비 경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유=중·일이 경쟁하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보겔=동아시아 평화 유지를 위해 포괄적이며 안정된 기본 틀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동아시아의 군비경쟁이라는 상황에 대해서도 검토해야 한다. 핵경쟁의 경우 인도, 파키스탄까지 포함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남북한 간의 포괄적 협의를 시작, 군비통제에 대한 기본 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유=그러나 중국은 미국이 동아시아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보겔=중국의 당면 관심은 대만이다. 중국은 이번 대만의 선거에 관심이 크다. 미국이 대만에 무기공급을 계속하고, 대만이 중국과의 양안(양안)협상에 충분한 성의를 표시하지 않을 경우 양측간 충돌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

▲유=미국은 중국과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지만, 중국은 러시아와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대립적 흐름을 미국은 어떻게 재조정할 것인가?

▲보겔=중·러 접근을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냉전시대와 같은 관계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향후 수십 년간 미국이 중국과 동맹관계를 가질 가능성은 없지만, 중국과 협력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미국은 중국과의 군사교류 등에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유=94년 제네바 기본 합의에 서명할 때, 미국 정부 관리들의 주요 가정 중 하나가 북한이 조만간 붕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런 가정이 유효한가?

▲보겔=일부 군 인사들이 그런 견해를 표시했다. 분명한 것은 북한처럼 통제된 사회의 경우, 정확한 예측은 거의 불가능하다. 북한 붕괴에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나진·선봉이나 남포 같은 개방을 계속하면, 생활면에서 편의를 누려온 북한 군부가 위기 의식을 느낄 수 있다. 다른 시나리오는 북한 사회의 총체적 붕괴다. 탈북 난민이 하나의 지표가 되겠지만, 북한 체제를 위협할 규모는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세계 정보가 확산되면, 광범위한 불만과 반대도 가능하다.

▲유=미국의 대북 개입(Engagement)정책은 북한의 코를 꿰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데, 가끔은 오히려 북한이 미국의 코를 꿴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보겔=미국은 세계 초강국이다. 핵 보유를 막는 문제는 미국의 기본 입장이자 과제다. 북한의 핵 보유 시도는 위험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고, 세계적으로 잘못된 선례를 남기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전쟁같은 무력 사용보다는 일부 양보를 통해 북한 핵문제의 해결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유=김정일(김정일)은 딜레마에 처해 있다. 경제 개선을 위해 개방이 필요하나, 개방이 자칫 정권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겔=100% 동의한다. 하지만 최근 한·미·일의 대북 포용 정책은 조금씩 북한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일부 북한관리들이 호주에서 시장경제 운용 방법을 물었고, 최근 하버드 대학 방문에서 학문 교류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유=미국이 중국 인권 문제를 비판하면서, 중국보다 훨씬 심각한 북한 인권 문제에 침묵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특히 북한 난민 문제에 대한 침묵은 이해하기 힘들다.

▲보겔=북한이 개방되고, 열악한 인권 상황이 알려지면 미국 내부에 강력한 여론이 등장할 수 있다.

/정리=박두식기자dspark@chosun.com

◇에즈라 보겔(Ezra F. Vogel) 약력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 졸업(50년)

-하버드대 사회학 박사(58년)

-예일대 조교수(60~61년)

-하버드대학 교수(67년~현재)

-미 정부 국가정보협의회(NIC) 동

아시아 담당 분석관(93~95년)

-하버드대학 페어뱅크센터소장

및 아시아센터소장 (95~99년)

◇주요 저서

‘일본의 신중산층’(Japan’s New Middle Class, 63년), ‘일등국가로서 일본·미국을 향한 교훈’(Japan as Number One-Lessons for America, 79년), ‘4마리의 소룡(소룡)-동아시아에서의 산업화의 확산’(The Little Four Dragons-The Spread of Industrialization in East Asia, 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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