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 남로동과 북로당은 합당에 합의했으나 북한정권 수립을 위한 내각 인선에 착수하면서 쌍방간에 불협화음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서로가 내각의 요직에 더 많은 자파인물을 배치하기 위해 기세싸움을 벌였는데 이는 정국의 주도권과 향후 권력향배를 가늠 하는 첫 단추를 끼는 작업에 해당하기 때문에 어쩌면 불가피한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남북 노동당의 수뇌들은 내각 인선을 놓고 연일 회의를 열었지만 쉽게 합의를 보지 못했다. 먼저 각 성의 상(장관)을 어떤 비율로 나누느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남로당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숫자를 고려, 남북이 6대 4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남북이 절반인 10명씩 맡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실제로 남로당과 북로당이 차지한 자릿수는 크게 차이가 났다. 북쪽을 완전 장악한 북로당은 지분 가운데 9석을 가졌지만 남로당은 남쪽지분 중 5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나머지 5석은 기타 정당들이 나눠 가졌다. 내각 구성에서 북로당은 남로당을 압도한 셈이다.
비율이 정해진 뒤 구체적인 인선에 들어가자 갈등은 증폭됐다. 내각수상은 소련에서 점지한 김일성으로 이미 정해졌고 부수상 3명도 남쪽의 박헌영과 홍명희, 북쪽 김책으로 쉽게 결정됐다.
쌍방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됐던 자리는 사법상이었다. 남로당은 최용달을 추천했으나 북로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이승엽 카드를 내놨다. 이에 대해 북로당은 "이승엽이 남쪽에서 할 일이 많으므로 무임소상이 알맞다"고 주장했고 남로당은 "그가 남로당 현지 지도부를 맡았던 지도자이므로 권위있는 자리를 줘야 한다"고 맞섰다.
외무상 자리도 논란의 대상이 됐다. 북로당은 주영하를, 남로당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을 지낸 남쪽출신 이강국을 천거했다. 양쪽은 외무상이 남쪽 지분임을 인정, 부수상 박헌영이 겸직한다는 선에서 타협했다.
주영하는 교통상으로 자리로 밀렸고 신진당 출신 이용이 도시경영상으로 내정됐다. 내각 인선 논의는 정권수립을 공식 선포(1948.9.9)하기 하루 전까지 계속됐고 몇몇 자리는 수상인 김일성에게 위임했다. 최고인민회의 의장에는 허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는 김두봉이 각각 내정됐다.
이렇게 내각이 구성됐으나 남로당은 여전히 불만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비교적 힘있는 자리들을 대부분 빼앗겼기 때문이다. 특히 연안파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김두봉)을 비롯, 내무상(박일우)·재정상(최창익)·문화선전상(허정숙) 등을 차지한 것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이같은 불만은 정권 수립 후 여러 형태로 노출됐고 드디어는 김일성과 박헌영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돼 훗날 남로당계의 몰락을 불러오는 한 원인이 되었다.
작성일:2013-10-30 16:05:35 203.255.11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