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부는 유럽식 신뢰구축장치를 한반도에 적용하는 것을 선호해 왔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성된 국제정치적 현실을 인정한 방안을 한반도에 원용하여, 한·미 군사동맹체제가 보장되는 남북관계를 선호했던 것이다.
따라서 효율적인 군축협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현실을 인정하는 정치적 신뢰구축이 필요하고, 이를 군사면에서의 관계개선으로 발전한다는 논리를 전개해왔다.
이러한 논리는 통일보다는 현시점에서 평화공존을 강조하는 김대중정부의 논리로 이어지고 있고, 국내외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엄청난 군사력의 현수준을 그냥 두고 유럽식 모델을 통한 신뢰구축을 강조하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다. 북한 군축 및 평화연구소의 이형철 연구실장(현 유엔대사)은 "엄청난 군사력으로 군사적 긴장이 높은 상황에서 무력의 수준은 그냥 두고 부차적인 이른바 '신뢰구축'을 추진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유럽에서 군축이 급진전된 것은 장기간에 걸친 신뢰구축장치가 선행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합리적 충분성'에 입각한 고르바초프의 일방적 감축과 광범위한 유럽인들이 참여한 반핵운동이다.
1975년 헬싱키에서 신뢰구축장치가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다시 냉전을 맞이하였고, 또 1975년 신뢰구축장치가 마련되기 이전에도 간헐적인 군축협상이 존재하였던 사실은 유럽군축이 신뢰구축이 선행되었기 때문이라는 논리의 허구성을 보여준다.
또한 1980년대 초에 유럽에 퍼싱-2 미사일과 SS-20 미사일이 배치되었을 때, 서독의 슈미트 총리는 동독의 호네커 총리를 방문해 독일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유럽의 정치적 지도력은 유럽에서 군축협상을 성공시킨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한반도에서도 상대방을 침략할 의사가 없음을 약속하고 이에 따라 병력과 무기를 감축하는 것이 신뢰구축의 길이며 군축의 길이다. 이를 위해서는 불가침과 군축을 약속하고 있는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이 요구된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신뢰구축과 군축의 첫걸음은 남북합의서를 이행하기 위한 남북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마련된 남북 정상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진 평화체제 구축문제에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작성일:2013-10-29 17:30:29 203.255.11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