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국군포로 - 최초 생환 조창호씨 수기
 닉네임 : NK조선  2013-10-30 18:17:12   조회: 1034   
북한땅에서의 포로생활 43년. 온갖 고초 끝에 꿈에 그리던 남한으로 탈출한 조창호(64)씨. 대학 1학년 시절 6.25 발발하자 어머니의 권유로 자원입대, 포로가 된 이후 감옥소와 강제수용소 등에서 꿈과 청춘을 잃고 백발의 몸으로 북한을 탈출한 조씨의 일대기는 6 25의 비극 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공군 포로, 수용소생활, 북한탈출, 그리고 고국 귀환에 이르는 조씨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수기형식으로 나누어 싣는다. /편집자주

지난 4월중순 이선생(45)이 집으로 찾아 왔다. 이선생은 압록강 건너 중국땅에 살고 있는 조선족 교포로 중국 공민증을 갖고 있었다. 두 세달에 한번씩 국경을 넘어 자강도 일대에서 보따리 장수를 하는 이선생은 평소 우리 마을에도 자주 들렀다.

나는 그로부터 종종 구하기 힘든 생필품과 식량등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꽤 친하게 지내던 사이다. 재작년 내가 이선생에게 넌지시 "중국으로 몰래 탈출하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묻자 처음엔 펄쩍 뛰었다.

북한 당국에 걸리면 둘다 총살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선생을 볼 때마다 간청, 마침내 도와 주겠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두어달 전의 일이다.

◆ 조선족에 도움 간청

나는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힌 51년부터 43년동안을 일관되게 북한사회를 탈출해야 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52년 월남을 기도하다 실패한 이후 하루도 탈출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감옥소와 아오지 특별수용소, 강계 교화소 등을 전전하면서 인간 이하의 참혹한 생활을 해 온 나는 탈출하다 실패해 총살을 당하더라도 그 편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었다. 이선생은 일가족을 모두 데리고 북한을 탈출하라고 제의했다.

혼자 탈출할 경우 나머지 가족들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했다. 누가 들을까봐 겁부터 났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가족들이다. 우선 쌍둥이 아들(28)이 반대할 것이 뻔했다. 쌍둥이 형제중 작은 아이는 이미 결혼해 5백m 떨어진 곳에 살림을 따로 차렸고, 큰아이는 11월쯤 결혼할 예정이었다.

두 아이 모두 광산에서 기계고치는 기술자로 일하고 있고, 막내 딸아이(27)는 변전소에서 근무한다. 65년 나와 결혼한 아내(62)는 북한당국에 의해 79년 강제 이혼당한 후 소식조차 끊겼다.

아내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간호장교로 근무하다 국군에 체포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다가 북한에 송환됐다. 아내는 나의 사상을 의심한 국가안전보위부의 감시에 시달리다 결국 강제로 이혼까지 당하고 말았다.

며칠 밤을 고민하다 나는 결국 일가족 탈출을 포기했다. 아이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불쌍한 아이들. 그들에게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넘어가자고 얘기해 봤자 통할 리가 없었다.

평소 내가 북한사회의 모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사기행각에 대해 아무리 얘기해도 아이들은 별로 공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곤 했다.

물론 아이들도 북한 사회의 어떤 점이 나쁜지 전혀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불평을 늘어 놓다간 지금보다도 더 살기가 어려워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것 뿐일 것이다. 그런 생각에 더욱 가슴이 미어져왔다. 결국 첫번째 탈출 계획은 시도해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북한 탈출의 꿈은 버릴 수 없었다. 내 나이 벌써 예순넷. 남은 여생의 단 한달을 살게 되더라도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이선생을 다시 만나 "가족들은 도저히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 나 혼자라도 가겠다"고 말했다.

이선생은 가족들의 신변을 걱정했다. 내 나름대로 묘안을 생각해냈다. 평소 "죽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만약 내가 없어지더라도 어디서 자살한 것이 아니겠느냐 고 생각할 것이고, 나의 탈출 사실이 알려지더라도 가족들은 큰 화를 입지 않게 될 것 아닌가.

아이들에겐 늘 미안했다. 내가 일관되게 북한 사회를 비판하다 결국 온 가족이 감시받는 생활밖에 물려준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나를 잘 따라줬다.

내가 북한 사회를 비판할라치면 아이들은 "아버지 그런 소리 하지 말라우요. 죽을려고 그러십네까"라며 말리곤 했다. 아이들은 "그저 집에만 계시라우요. 우리가 농사지어서 아버지 모실테니까 걱정말라우요"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이선생과 탈출 계획을 짠 이후론 아이들앞에서 부쩍 "죽고 싶다"는 말을 되뇌었다. 아이들은 늙은 아버지가 일도 안하고 가계에 보탬도 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해 넋두리를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속으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 10월 폭우속 강건너

10월3일 밤 11시30분쯤 이선생이 갑자기 나타났다. 비에 흠뻑 젖은 채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두리번거리며 들어서는 그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선생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모든 게 준비됐으니 당장 떠나자"고 했다.

이선생에게 1시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선생을 보내고 술을 가져 오라고 해 아이들과 이별주를 마셨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웬일인가" 하는 표정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또 "죽고싶다"는 말을 했다. 아이들은 "또 넋두리를 하나 보다"하고 생각을 하는 것같았다.

피눈물이 쏟아졌다. 아이들이 잠들자 10월4일 새벽 2시쯤 집을 나섰다. 불쌍한 내 자식들, 애비를 잘못 만나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선생과 함께 30분동안 걸어서 압록강변까지 이동했다. 폭우가 쏟아져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보위부원들이나 국경수비대를 피해 숲속을 헤치며 걸었다.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탕길이었다.

옷은 찢어지고 나뭇가지는 온 몸을 찔러댔다.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국경 경비대의 초소 불빛이 보였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러나 폭우때문에 초병들은 밖을 내다 보지도 않았다. 설마 이런 날 탈출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걸리면 무조건 총살이 아닌가. 등골이 오싹했다.

◆ 너무나도 긴 10분

엉금엉금 기다시피해 겨우 강가에 도착했으나 이선생이 타고 왔던 고기잡이 배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초병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납작 엎드려 숨을 죽였다. 배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국인 전씨도 초병들의 떠드는 소리에 배를 강가 숲속에 숨겨 놓았었다.

그는 우리를 보자 빨리 타라고 손짓했다. 그는 배밑바닥에 나를 숨기고 비닐로 덮었다. 10분정도 노를 저어 강을 건넜을까. 아, 10분이 왜 그렇게 긴지 . 지난 43년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의 얼굴도 하나씩 떠올려졌다. 나 때문에 고초를 당하지나 않을는지.

새벽 4시쯤 압록강변의 전씨집에 도착해 중국인 어부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온 몸의 힘이 쭉 빠졌다. 서너시간 눈을 붙인 다음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셋이서 다시 배를 타고 중국 달라쯔 광산에 도착했다. 이선생이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다. 북한 보위부요원들이 탈북자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만주지역에까지 상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광산에서 이선생과 버스를 3시간동안 타고 백산시까지 갔다. 이선생의 중국 집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5일 아침 산림철도를 타고 청구시로 가 이선생의 누이 집을 찾아 갔다. 이날밤 드디어 이선생 누이집에서 서울에 있는 누이(조창숙 72 전건국대 가정대학장)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가 이뤄졌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울었다. 또 울었다. 누이는 "네래 정말 창호가, 창호란 말이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도 "창홉네다"라는 말만 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전화를 끊고 자리에 몸져 누웠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는지 다음날 일어나지 못했다. 풍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글씨도 못 쓸정도가 돼버렸다.

이선생의 누이가 치료받고 가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뿌리쳤다. 며칠 치료한다고 나을 병이 아니었다.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고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6일 아침 버스를 타고 심양에 도착,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14시간만에 대련까지 왔다. 7일 오전 8시쯤이었다. 북한으로부터 멀리 벗어났지만 불안은 여전했다. 이선생은 허름한 숙소를 잡아놓았다. 이선생은 한국으로 떠나는 밀항선을 수배했다.

그러나 중국 선장들은 하나같이 한국으로 밀항하기를 거부한다는 소식뿐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한국에 못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난후 이선생은 한국행 밀항선을 드디어 찾아냈다. 아, 이제 한국으로 가는구나. /정리=최우제기자(조선일보 1994.10.25)

⊙ 조창호씨는 누구인가?

연대생때 6.25가 나자 어머니 권유로 입대. 전 건대가정대학장 조창숙씨가 큰누이

43년만에 조국을 다시 찾은 조창호씨(64)는 의사인 할아버지가 일제때 평양에서 병원을 운영, 큰 재산을 모은 백만장자 집안의 장손이었다.

8살때 전가족이 서울로 이주한 뒤에도 유복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조씨의 인생이 생각지도 못한 궤적을 긋게 된 것은 6.25전쟁이 터지면서. 경기상고를 졸업하고 1950년 연세대 문과대학에 입학한 조씨는 전쟁이 나자 "나라가 어려운데 무엇하느냐"는 어머니(이곤옥, 1982년 작고)의 권유로 그해 10월 자원입대했다.

조씨는 보병학교 3개월, 포병학교 2개월 교육을 받은 뒤 51년 2월 소위로 임관됐다. 군번 212966. 그는 육본직속 포병 101대대 관측장교로 51년5월 인제전투에 참전중 퇴각하는 아군 대열을 놓치고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다.

인민군은 몇달간의 회유에도 그가 넘어가지 않자 52년 2월 월남을 기도한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찍어 13년 교화노동형에 처했다. 조씨는 전쟁중 덕천, 서흥, 함흥 등지의 수용소를 옮겨다니다가 휴전부터 58년까지는 아오지, 58년부터 64년 5월까지는 강계교화소에 수감됐다.

만 12년6개월을 교화소에서 보낸 것이다. 이후에는 자강도 화풍광산을 시작으로 14년간 광부생활을 했다. 굴착기 착암기 굴진 지하광산 등 온갖 험악한 일을 하면서 조씨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됐다. 75년부터는 반동계급이라는 이유로 더 변방으로 밀려나 중강진 호하 구리광산으로 이동배치됐다가 77년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자 현업에서 물러났다.

조씨는 2년전 큰누이 창숙씨(74, 전 건국대 가정대학장)가 예전에 성신여대에서 교편을 잡은 사실을 기억해내고 사람을 통해 무작정 편지를 띄웠다. 성신여대 직원은 이 편지를 수소문 끝에 은퇴해 있는 창숙씨를 찾아 전해주었다.

51년 9월10일 중부전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처리돼 국립묘지에 위패까지 봉안돼있는 조씨가 살아있다는 소식은 남쪽의 가족들을 경악시켰다./ 최우제 기자(조선일보 199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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