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 4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서울답방 문제에 대해 “여건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그의 조기 답방이 어려울 전망이다. 서울의 외교당국자들은 7일 김 위원장이 이같은 언급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지만, 모스크바의 외교 소식통들은 두 사람의 관련 대화록까지 전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언급이 사실이라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연내에 이뤄질 가능성은 적어졌다고 봐야 한다.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에게 “미국의 대북 강경책이 최대 난관이 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부시 행정부가 대북 강경정책에서 물러서지 않는 한 남북관계 개선에도 적극성을 보이지 않을 것이란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고 부시 행정부가 기존의 입장을 바꿀 가능성도 희박하므로 김 위원장이 연내 서울행을 결심하기는 쉽지않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5월 초 평양을 방문한 페르손 스웨덴 총리에게도 서울 답방문제에 대해 “미국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영향력 때문에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다”고 언급했었다.

그러나 이번 발언은 그후 우리 정부와 미국이 여러 공식·비공식 채널을 통해 북한에 남북대화 재개에 나서도록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발언의 강도도 더 세졌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서울 답방을 꺼리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 당국자들도 일단 미·북관계를 우선 거론하고 있다. 남북관계를 미·북관계의 종속변수로 보는 북한의 기본적 시각이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어서 “남북관계를 개선해 이를 지렛대로 미국에 접근하면 되지 않느냐”는 우리 정부의 설득이 먹혀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이 북·러 공동선언에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포함시킨 것도 바로 북한이 미국과의 게임에 주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내 상황도 답방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여야가 극한 대립하고 여기에 정부와 언론과의 관계도 악화된 상태에서 그는 남한 주민들의 대대적 환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할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이같은 상황으로 북한내부에서는 김 위원장이 서울에 갈 경우, 경호 등 안전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욱 힘을 얻고 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기대했던 전력 지원 등 한국으로부터 얻을 것도 더이상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

결국 김 위원장의 답방은 미·북 관계의 획기적 진전이 없는 한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최고통치자의 결심에 따라 방향이 좌지우지되는 게 독재국가의 특성이란 점을 감안할 때, 김 위원장이 어느날 갑자기 전략을 바꾸어 서울에 가겠다고 나설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기대를 걸어온 김대중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어떤 카드를 내놓을지도 관심이다.
/ 허용범기자 he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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