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 졸리는 1864년 나폴레옹 3세가 세계 정복계획을 꾸민다는 ‘지옥의 대화’를 썼다. 러시아 비밀경찰 끄나풀이 이 책을 베끼면서 ‘나폴레옹’을 ‘유대인’으로 살짝 바꿨다. 1905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시온 장로 의정서’다.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는 ‘시온의정서’는 1차대전 직후 독일서 번역됐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서유럽의 금권주의 정치와 러시아 공산주의를 배후 조종한다고 부풀렸다. 그러곤 600만 유대인을 학살했다.

▶9·11 테러가 미국 정부 자작극이라는 다큐멘터리 ‘루스 체인지’(Loose Change)가 인터넷에 번지고 있다. 스물 갓 넘긴 미국 청년 에이버리가 작년 말 9·11 테러 생존자와 소방관, 기자 인터뷰를 엮어 만들었다.

그는 세계무역센터가 비행기 충돌이 아니라 건물 내 폭발로 무너졌고 펜타곤에 부딪친 것은 크루즈 미사일이라고 주장한다. 부시 대통령이 권력을 강화하려고 테러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1987년 벵골만 상공에서 공중 폭발해 승객·승무원 115명이 사망한 KAL 858기 사건도 정보기관 공작설에 시달렸다. 대학가엔 군사정권 자작극이라는 유인물이 나돌았다.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두고 터진 데다 폭파범 김현희가 선거 전날 송환돼 여당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2003년에도 천주교 신부 115명과 유가족이 ‘조작’을 주장했다.

일본 작가가 쓴 ‘김현희는 가짜다’라는 책이 서점에 깔렸다. 국내 TV 시사프로그램들도 음모론을 거들었다.

▶국정원 과거사규명위가 어제 KAL기 폭파를 안기부가 꾸몄다거나 미리 알고 있었다는 주장은 근거 없다고 발표했다. 20년이 되도록 음모론이 끊이지 않던 KAL기 사건에 쐐기를 박은 셈이다.

과거사위는 안기부가 일부 수사결과를 잘못 발표해 의혹을 키웠고 사건을 선거에 유리하게 활용하려고 공작한 사실은 확인했다고 밝혔다. 정부가 음모론이 활개칠 만한 여건을 거들었다는 얘기다.

▶큰 사건일수록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 많다. 음모론자들은 같은 대통령 저격이라도 정신이상자 단독범행보다는 치밀한 계획에 따른 암살로 몰아간다. 정권이 정보를 통제하고 정보의 흐름이 막힌 시대에 음모론은 번성했다.

그러나 현대 미디어학자들은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이 오히려 음모론을 키우고 있다고 말한다. 익명성과 빠른 전파 속도 때문이다. 음모론에 솔깃한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다.
/김기철 논설위원 kichu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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