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金正日)의 스파이들이 서울에서 사태를 지휘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김정일)가 이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바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AWSJ) 사설(2004년 10월 25일자)이다. 제목은 ‘평양의 더러운 일 해주기’.

“한국의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이 지난주 제출한 국가보안법과 언론관련법 등 논쟁적인 법안들은 마치 평양에서 쓰인 듯하다” “한국의 집권자들은 핵무기로 무장한 김정일 세력보다 남한의 자유언론매체를 더 큰 적(敵)으로 간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국내 언론에선 상상하기 힘들만큼 비판 수위가 높았다.

AWSJ는 우리당 언론관련 법안의 진정한 의도는, 조·중·동으로 불리는, 남북한 정부를 비판하는 ‘빅3 신문’을 겨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신문은 단일 신문의 시장점유율이 30%를 넘거나 3개 신문의 점유율 합계가 60%를 넘으면 정부 개입을 허용하는 법안은 자유시장 개념에서 전례(前例)가 없는 것이라고도 적었다.

이해 11월 7일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도 한국 신문법안 문제를 거론했다. ‘한국정부 3대지(紙)에 압력’이란 제목이 달린 이 기사는 “정권비판을 거듭한 대형신문에 부아가 치민 여당이 ‘언론의 문제점을 해소한다’며 신문시장 점유율 등을 규제하는 새 법안을 국회에 냈다”고 썼다.

아사히·요미우리·마이니치 3개 신문이 중앙 종합일간지 신문시장 100%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언론으로선, 한국 여당의 이 법안이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 3개 메이저 신문은 일본 공중파 TV방송을 겸영하고 있다. 한국이란 나라는 언론에 관한 규제란 면에서 보면 후진국 중에서도 한참 후진국이란 생각을 일본 언론인들이 할 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국제적 권위를 가진 해외 언론의 이같은 비판적 시각은, 정권을 잡은 노무현 정부와 우리당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다수의 힘으로, 이해 연말 새 신문법안 등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결국 2년 뒤, 두 해외 언론이 지적한 한국 신문법안의 ‘60% 규제 조항’ 등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위헌과 헌법 불합치 판정을 내렸다.

그리고 어제(2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언론재단 주최 ‘헌재 결정과 언론관련법 개정 방향’ 토론회장. 헌재 결정에 따른 후속 조치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전향적인 논의를 기대했다.

그러나 토론자로 나온 김재홍 열린우리당 의원의 발제문을 읽는 순간, 시계는 다시 2004년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낡은 녹음 테이프가 돌듯 그는 이번에도 2004년 당시의 논리를 되풀이했다. 심지어 2004년 우리당 의원들도 ‘심하다’고 판단했는지 자진해서 신문법안에서 제외시켰던 신문사 소유지분 문제까지 법안에 새로 넣자고 그는 제안했다.

기자는 김 의원과 2004년 5월 MBC TV ‘100분토론’에 함께 출연, 소위 ‘언론개혁’을 주제로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그는 시민단체들의 요구로 이 법안을 마련하게 됐고, 신문시장 규제의 근거로 유럽 신문 모델들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 유럽 현실을 제대로나 파악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당시 EU 국가별 일간 신문시장의 독과점 현황을 보자. 1개 신문사, 혹은 1개 미디어그룹이 전체 신문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오스트리아는 57.4%, 아일랜드는 64.1%, 핀란드는 34%, 네덜란드는 30.8%, 영국은 31.2% 포르투갈은 40%에 달했다.

신문 역사가 수백년인 이들 국가들은 2004년 한국의 여당 의원들만큼 못나서 이런 신문 규제 법안을 만들지 않은 것일까?

정답은 역시 독자에 있을 것 같다. 물론 여론 다양성을 위해 유럽국가들도 방송에 관해서만은 엄격하게 시장점유율 규제를 한다. 그러나 돈을 주고 독자가 선택하는 신문의 경우는 사정이 크게 다르다.

미국은 유럽보다 한 수 위다. 연방수정헌법 1조가 ‘의회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법률도 만들 수 없다’이다.

신문 산업을 규제하는 언론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쯤 이런 ‘국제 규격’ 언론 환경을 가질 수 있게 될까? 여야 의원들이 선진국 언론법제에 대해 더 공부하기를 바랄 뿐이다.

어제 재보선 선거에서도 여당은 참패했다.

이 정권이 요즘처럼 인기가 없는 이유도, 스스로가 정치를 잘 할 생각은 않고 비판언론을 규제함으로써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그런 심보를 가진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진성호 조선일보 인터넷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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