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인선 정치부 차장대우


1962년 10월 미국과 소련을 핵전쟁으로 몰아넣을 뻔한 사건이 일어났다. ‘쿠바 미사일 위기’다. 미·소의 핵군비 경쟁이 한창이던 냉전시대, 소련은 미국의 뒷집이나 다름없는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건설하고 핵미사일을 배치하려 했다. 미국이 영국, 이탈리아에 이어 터키에까지 핵을 배치한 데 대한 맞대응이었다.

사태는 일촉즉발의 위기국면으로 치달았다. 미국이 항의하자 소련은 미사일 배치는 억지력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군사적 대응은 너무 위험하고, 유엔 안보리에서 해결하는 방안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판단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를 해상 봉쇄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에 쿠바의 미사일기지를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요구했다.

케네디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흐루시초프도 미사일기지 철거를 명령했다. 위기는 13일 만에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40년 후인 2002년 10월 쿠바에서 미사일 위기 관련자들의 증언과 비밀문서 공개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해보는 회의가 열렸다. 회의 첫날부터 충격이었다. 당시 상황은 미국의 안보정책 담당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이 국가 안보를 걸고 전력 투구해서 알아낸 정보는 나중에 보니 허점투성이였다. 쿠바에는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미사일이 이미 배치돼 있었다. 소련의 전술핵은 13일간의 위기 이후에도 20여일을 더 쿠바에 머물러 있었다.

로버트 맥나마라 당시 국방장관은 쿠바의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나 흐루시초프가 핵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은 핵전쟁을 시작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위기는 핵전쟁에 훨씬 더 가까이 간 상태였다. 위기를 막은 사람은 뜻밖에도 바실리 아르키포프라는 소련의 해군 장교였다.

미국 함정에 포위된 소련 잠수함 함장은 이미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착각해 핵어뢰 발사를 준비했다. 핵어뢰는 3명의 장교가 만장일치로 합의할 때만 발사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아르키포프는 모스크바에서 명령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만일 그때 아르키포프가 쉽게 동의했다면 세계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40년 전 위기의 실상을 다시 들여다보고 나서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지난 5일 북한의 미사일 무더기 발사사건 이후 우리는 정부의 ‘신중하고 차분한’ 대응을 보고 있다. 정부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신중을 기한다는 것은 위기의 본질을 속단하지 않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데 있다.

그러나 청와대는 북한 미사일 발사가 “안보적 비상사태는 아니었다”는 식이다.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무시하고 미사일을 발사한 북한보다는 정부의 늑장 대응을 지적한 ‘일부 언론’을 비판하는 데 더 열을 올리고 있다.

정부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론하는 것조차 공연히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일이라고 비난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교훈은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나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가 북한의 심상치 않은 미사일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을 때도 ‘인공위성’일지 모른다며 모호한 태도를 보였던 정부 아닌가.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할 정부가 희망 섞인 예측을 앞세우며 언론 탓만 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불안한 일이다./강인선 정치부 차장대우 insu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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