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배 잠깐 타고 온다고 했는데 그게 끝이었어요.”

납북 고교생 김인철(납북 당시 17세)씨의 누나(60.서울 거주)는 4일 1968년 8월의 기억을 더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인철씨는 당시 주문진수산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여름방학에 속초 집에 왔다가 호기심에 오징어잡이배 덕수2호를 탔다가 납북됐다.

당시 같이 배를 탔던 선원 31명 가운데 25명은 돌아오고 인철씨를 포함한 6명은 북한에 억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누나 김씨는 “8월6일 인철이가 점심을 먹다 ’나도 배 한 번 타봤으면’했는데 가족들이 처음에는 반대하다 ’하루만’이라는 조건으로 허락했다”며 “그런데 다음날 새벽 돌아온 배에는 인철이가 없었다”고 목이 메였다.

이후 인철씨의 어머니는 “(배를 타도록 허락한) 내가 죽일 년”이라며 매일같이 경찰서에 ’출근’했고 점집이란 점집은 모두 찾아다녔다.

인철씨 사진은 이곳저곳 관공서에 보내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4남2녀 중 셋째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결국 1988년 한을 품은 채 눈을 감았다.

아들의 실종에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던 아버지도 1986년 사망했다.

김씨는 “인철이가 태어날 때 탯줄을 감고 나와 돌이라고 불렀다”면서 “그만큼 어머니는 동생에 대한 애틋함이 컸고 (실종 후) 20년의 세월이 후회와 기다림, 간절함이었다”고 말했다.

누나 김씨가 기억하는 인철씨는 명랑한 모범생이었으며, 바로 아래 동생인 인철씨는 누나를 잘 따랐다. 그만큼 ’왜 그때 다른 곳에 놀러가자고 하지 못했을까’라는 후회와 죄책감이 컸다.

김씨는 동생이 북한에서 이남화(以南化) 교육기관에 근무하다 자리를 옮겨 통일 관련 사업에 종사한다는 소식을 3일 밤 언론을 통해서야 전해들었다.

김씨는 “납북.납치 얘기 나올 때마다 울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우리 가족은 인철이 제사도 지내지 않고 기다렸다”며 “그래도 생각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을) 빨리 알게 됐다”고 안도했다.

또 “김영남씨 가족의 상봉을 보면서 많은 희망을 갖게 됐다. ’뭔가 (동생에 대해) 알게 되겠구나’하는 희망이 생겼다”며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우선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동생이 장가는 갔는지, 올케는 어떤 사람인지, 건강한 지 궁금한 것도 많다”면서 “언젠가 만나면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 얘기를 먼저 해주고 싶다”고 밝혔다.

김씨는 거듭 “하루라도 빨리 인철이를 만나고 또 송환까지 이뤄졌으면 좋겠다”며 “학생시절 끌려간 아이들이 억울하니 정부에서도 노력해 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고 덧붙였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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