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남사업 종사자 세대교체 필요했기 때문”
공작선 활용 납치 용이한 바닷가가 주된 공작지역


금강산에서 28년만에 어머니 최계월씨를 만난 김영남씨가 행방불명된 1978년과 1977년에는 남쪽에서 북에 의한 행방불명사건이 빈발한 시점이어서 눈길을 끈다.

1977년부터 1978년 사이에 남쪽에서 행방이 묘연했던 사람은 당시 16세였던 김영남씨를 비롯해 이민교(당시 18세), 최승민(당시 16세), 이명우(당시 17세), 홍건표(당시 17세)씨로 군산 선유도 해수욕장과 신안 홍도 해수욕장에서 납북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이 모두 고교생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기는 하지만 사실 더 주목할 대목은 1977년을 전후로 납치가 최고조에 달했다는 점이다.

1978년 최은희·신상옥씨가 홍콩에서 납치된 것을 비롯해 전라남도 완도군 소재 넙도국민학교 교사 서재석씨가 숙직실에서 자다가 납북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1979년에는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씨가 오슬로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일본인 납치 피해자인 요코다 메구미씨도 1977년 니가타에서 납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기적으로 이들의 납치가 1977년을 전후로 집중된 것은 공작원과 공작원 교육자의 세대교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6.25전쟁이 끝나고 25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라는 점에서 북한에 있는 남한 출신자들의 나이가 많아지면서 남한 현지사정에 밝은 공작원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공작원 출신의 한 탈북자는 “1970년대 당시 납치사건이 빈번했던 것은 대남사업 종사자의 세대교체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당시 북한의 납치대상은 고교생이나 30대 전후의 남한사람에 집중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교생은 성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계관이 덜 확립됐다는 점에서 북한사회에 대한 적응속도 등이 빨라 납치 1순위가 됐을 것으로 분석된다.

이 같은 북한의 당시 방침에 따라 납치된 남한 주민들은 북한에서 주로 ’이남화 공작교관’으로 일하면서 북한의 공작원들에게 남한사회에 대한 교육을 시켜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납치자들의 최종 행적이 밝혀진 곳이 바닷가 근처라는 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아무래도 당시 북한은 공작선을 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남한사람을 납치하기가 용이한 바닷가가 주된 공작지역으로 선택됐던 것으로 보인다./연합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