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 다른 부대는 다 후퇴했는데, 자네는 왜 여기를 지키고 있나?” “저는 군인입니다.

상관의 명령 없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 게 군인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 겁니다.”

1950년 6월 29일, 당시 스무 살의 한 일등병은 서울 영등포에 있던 진지(陣地)에서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전쟁이 터진 지 나흘째, 이미 한강 이북은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그곳은 남한의 부대가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강방어선이었고 맥아더 장군은 도쿄에서 날아와 상황을 돌아보던 참이었다.

“정말 훌륭한 군인이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즉시 지원군을 보내주겠다.”이 군인에게 감동 받은 맥아더 장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약속대로 곧바로 한국전 참전은 실행에 옮겨졌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는 “맥아더 장군이 당시 한국군 병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참전을 결심했다는 사실은 참전 장성 회고록 등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고 말했다.

수십 년째 묻혀져 있던 이 일등병의 존재가 최근 밝혀졌다. 신동수(辛東秀·77)옹이다. 그를 찾아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으로 향했다.

“이렇게 멀리 오게 해서 어쩌나. 다리가 이래서….” 그는 왼쪽다리를 절었다. 양말에 가려졌지만, 한눈에도 의족(義足)임을 알 수 있었다. 기쁨인지, 고통인지 모를 옛 전투 이야기를 시작하자, 신옹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다.

그가 속한 부대는 백골부대 18연대 1대대 3중대였다. 6월29일 이들은 영등포구 양화동의 인공폭포공원 인근에 진지를 편성해놓고 있었다. 다른 대대는 물론 같은 대대 다른 중대도 후퇴해버린 외로운 싸움이었다. 사흘째 굶고 있던 그때였다.

“4명이 지프에서 내리더라고. 처음에는 소련군인줄 알고 쏘아 죽이려고 쫓아나갔어요. 하지만 정모 마크가 소련군 것과 다르더라고. 사령관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대화가 끝난 후 맥아더 장군은 그에게 연막탄 2개와 대공표지판을 선물로 줬다. 부관(副官)이 연막탄 하나를 갖고 시범을 보여줬다. 핀을 뽑아서 한강으로 집어 던지니, 노란 연기가 피어 올랐다.

“그때 연막탄이라는 게 뭔지 알았나요. 전투기가 아무 곳에나 막 쏘아댈 때였는데, 그걸 피우면 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바람이 불면 대공표지판이 날아가니까 돌로 꼭 괴어놓으라는 말도 덧붙였어요.”

그리곤 곧 그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노량진과 영등포까지 진격한 인민군의 총포가 시시각각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 “우리 머릿속에는 오로지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어요.”

맥아더 장군이 돌아간 이후에도 그는 사흘을 더 버텼다.

“결국 후퇴 명령을 받았습니다. 중대원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며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었죠. 갑자기 다리가 오그라들더니 펴지질 않더라고요. 그러고도 150m를 뛰었어요.

살기 위해 아무 집이나 찾아가 부뚜막 아궁이에 숨었는데, 착한 주인이 온몸을 닦아주고 빨간 헝겊을 찢어서 인민군 치료소에 데리고 가주더군요.”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총탄에 맞은 다리를 치료받지 못했다. 무릎에선 구더기까지 나왔다.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 다리를 절며 절며 찾아간 강원도 춘천. 하지만 남동생은 형을 찾으러 가겠다며 인민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못 만난 세월이 무려 56년이 됐다.

당시 100여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7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7일 동안의 처절한 혈전 덕분에 인민군의 서울 함락은 늦어졌고, 지연전을 위한 재편성, 유엔군의 조기 전선투입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의 잘린 다리가 나라를 구한 것이다. “6월 25일만 가까워오면 내가 묻어준 동료들, 내 앞에서 죽어간 동료들이 떠올라요. 군번도 없이 죽어간 전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그걸 알고 있나요?”
그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박란희기자 r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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