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에 사는 후배가 오랜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후배는 핀란드 사람과 결혼해 아이 셋을 낳아 기르며 일하고 있다. 핀란드에 대해서는 모범적인 복지국가, 산타 마을이 있는 나라, 호수가 많은 깨끗한 환경을 가진 나라라는 정도밖에 몰랐다.

후배는 “핀란드 엄마들은 아이들 공부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아 문제”라든지 “아이를 다섯 명이나 낳으며 매번 출산휴가를 1년씩 가도 대기업 경영자로 성공할 수 있다”든지 하는 ‘먼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날 가장 마음을 울렸던 부분은 후배의 일곱 살 난 큰아들 이야기였다. 큰아들은 또래에 비해 말이 좀 늦어서 국가의 ‘특별 관리’를 받고 있다. 아이는 두 살 때부터 유아원에 다녔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아이가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집에서 영어와 한국어로 키웠기 때문에 아이는 핀란드 말을 잘 하지 못했다.

두 살배기에 대한 대대적인 검사가 시작됐다. 우선 청력 검사부터 했다. 후배는 “핀란드가 대단한 복지국가인 것은 알았지만 의사 열명이 며칠 동안 우리 아이를 붙들고 검사하는 것을 보고 진짜 놀랐다”고 했다.

듣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판정이 난 후 지능과 발달 수준 등에 대한 각종 검사와 상담이 이어졌다. 아이는 최종적으로 남들이 13년 받는 의무교육을 15년 동안 받으라는 ‘처방’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니까 그 나라는 남보다 좀 늦는 사람이 있으면 기다려서 다 데리고 가려는 거로구나”라고 했더니 후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지제도가 워낙 잘 발달된 나라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인구가 500만명밖에 안되니까요. 누군가 좀 뒤처진다고 해도 그냥 놓아두고 가지 않아요. 정부는 우수한 애들에겐 별로 신경을 안 써요. 그런 애들은 스스로 알아서 잘 하니까요.”

핀란드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가 넘는 나라다. 여성 취업률이 72%(우리나라는 53.9%),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국가경쟁력 평가에서는 10위(우리는 38위)를 기록했다. 핀란드는 또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특히 높은 나라다.

뒤처진 아이들을 기다려주고 끌어올린 덕에 공부 잘 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 간의 학력 격차가 좁혀진 덕분이라고 한다. 학교 다니는 스트레스가 적어 중도 탈락자가 적으니 전국민의 학력이 올라간 것이다. ‘사람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는 사회’가 이렇게 경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구나 싶었다.

그때 얼마 전에 보았던 어느 탈북자 인터뷰가 떠올랐다. 미국이 일부 탈북자들의 망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직후 ‘미국에 가서 살 기회가 있다면 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미국이 더 잘 사는 나라여서가 아니었다.

“한국 사회는 우리 탈북자들이 적응하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였다. 말도 통하고 문화도 비슷하고 정착금도 주지만 늦게 따라오는 사람들을 ‘기다려주지 않는 나라’보다야 그래도 좀 더 인간적이라는 미국이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뒤처진 사람을 기다려주는 여유’란 사실 별 게 아니다. 문 열고 나갈 때 뒤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여유다. 뒤에 장애인이 서 있는지 어린이가 있는지 한 번 돌아보는 마음이다.

한 사회의 경쟁력이 앞을 보고 달리는 힘에서 나온다면 선진성과 성숙도는 뒤돌아보고 약자를 기다려줄 줄 아는 여유에서 나온다. 게다가 이렇게 빨리 변하는 사회에서 지금 강자인 사람이 영원히 강자일 리는 없다. 언젠가는 당신도 누군가가 당신을 기다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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