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전 기생들 속내 들여다볼까

‘젊은 나이에도 노래와 춤 모두 빼어난 기생 화월(花月). 휘영청 밝은 봄밤. 그녀는 비단 주렴을 걷어 방안으로 달빛을 들인다. “달은 밝고 바람은 맑아요.

이렇게 멋진 밤을 어찌하면 좋지요?” 그녀는 대동문 성루에 올랐다. 쪽진 머리에서 은비녀를 뽑아 난간을 치며 노래했다. 지나던 구름도 멈춰 귀를 기울였다….’

19세기 초반 평양 기생 67명을 ‘인터뷰’한 글이 발견됐다. 한재락(1775년 직후~1833년 이후)의 ‘녹파잡기(綠波雜記)’다. 개성 갑부의 아들이었지만 과거(科擧)에 실패했던 그가 이름난 평양 기생을 직접 만나 용모·예술적 자질·성격을 기록한 책이다.

안대회 명지대 교수(한문학)는 최근 단국대와 고려대에서 이 책의 필사본을 찾아 내용 일부를 발표하면서 “이 책에 성행위 장면은 없다. 간결한 문장에 정감을 살린 격조 높은 글”이라고 평했다.

기생들의 인간다움은 사랑이야기에서 두드러진다. 열한 살 초제는 비 내린 어느 날, 벼슬아치 행차에 ‘출장’ 나가려다 가죽신에 구멍이 났다. 어찌할 바 모르는 그녀를 위해 더벅머리 소년이 신을 벗어주고 맨발로 갔다.

그녀는 소년의 신발을 꼭 감싸 쥐고 말했다. “저 비록 어리지만 처녀의 몸으로 다른 이의 신발을 신었다. 규방 여인의 행실이 변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그와 인연을 맺게 되면 오늘 일 때문일 것이다.”


◇ 평양 기생에 대해 기록한‘녹파잡기’. 안대회 교수 제공


남자를 겪지 않은 열다섯 초운은 한 유명한 선비로부터 시를 받았다. 이후 다른 손님을 거절한 채 우울하게 지냈다. 세월이 지나 선비가 평양에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품속에 지닌 선비의 시를 보여 주었다. 얼마나 보고 또 보았는지 보풀이 심하게 날 정도였다.

기생 나섬은 곱고 아름다웠지만 도도했다. 준수한 남자와는 하루 저녁 정을 붙였지만 천박한 사내와는 백 꿰미 금전을 줘도 쳐다보지 않았다. 어느 소년 손님이 그녀의 가락지를 집어서 외설스런 짓을 했다. 그녀는 바로 가락지를 뺏어 부숴버린 뒤 정색하고 준절하게 책망했다.

67명 기생 중 맨 처음 등장하는 스물네 살 죽엽. 웅장하고 화려한 한양을 사랑하고, 개성 만월대 폐허에 눈물지었다는 그녀는 말한다. “언젠가 저도 한 사내를 만나면 그 남자 속박을 받겠지요. 봄 가을 좋은 날 명승지를 골라 거문고를 안고 가서 마음껏 노닐며 이 젊은 날을 놓치지 말아야지요.”

이동환 고려대 명예교수는 “황진이·홍랑 같은 유명 기생의 기록이 일부 있지만 이처럼 기생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책에 묘사된 평양 기생들은 서화와 음악을 즐기는 ‘교양인’이었고, 지조도 높았다. 사랑하는 남자와 젊은 날을 즐기려는 탐미적 경향도 보인다. 책 제목 ‘녹파’는 대동강 푸른 물결, 평양을 상징한다. /신형준기자 hj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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