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주원이. 어느 날 밤 누나 등에 업혀 집을 떠났다. 목적지는 대한민국. 아이는 함경북도 샛별군 하면에 살았다.

강을 건너면서 큰형은 병든 아버지 곁에 있겠다고 발길을 돌렸다가 수비대에 끌려갔다. 아이는 누나와 함께 두 달 동안 중국 선양(瀋陽)에 있는 창문 없는 방에 갇혀 살다가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2005년 9월이었다.

지금 주원이는 아프다. 병명은 다발성연골종양. 머리부터 발끝까지 뼈마디란 뼈마디들이 죄다 자라나는 병이다. 그 고통, 의사들이 “(이 고통을 이겨내면) 아이가 못 견딜 고통은 없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끔찍하다.

수술 후유증 탓에 아이는 몸이 뜨겁다. 그래서 아이는 모든 음식을 얼려서 먹는다. “그렇게 돼지고기랑 쇠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는데, 한국까지 와서도 먹이지를 못….”

먼저 탈북해 아이들을 탈출시킨 엄마(김명심·47)는 낯선 기자 앞에서 말을 끝내지 못하고 운다. 아이가 따라 울까봐 소리를 꾹꾹 누른다.

서울 중계동의 18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가 주원이네 집이다. 주원이 엄마는 군인이었다. 예술단원이던 남편과는 가정불화로 일찍 헤어져 살았다.

명심씨는 평양에서 근무하면서 이따금 아이들을 찾아가곤 했다. 2002년 11월 중요한 문건이 사무실에서 없어져 큰 문제가 되자 북한을 탈출했다.

한국에 도착한 뒤 불면증이 찾아왔다. “애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이 밥, 아이들도 먹고 있을까….” 그러다 탈북 관련 단체를 통해 아이들과 전화 연락이 닿았고, 이후 이리저리 번 돈을 정기적으로 보냈다.

“어느 날 통화에서 딸이 그래요. 주원이가 자꾸 넘어지고 맥을 못 춘다고요.”명심씨는 아이들을 빼내기로 마음먹었다. 2005년 7월, 엄마는 1300만원을 들여서 아이들을 중국으로 빼냈다.

그런데 2주일이면 몽골에 도착했어야 할 아이들이 두 달째 중국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500만원을 들여 중국으로 갔다.

선양에서 어렵게 만난 딸(순성·22)은 엄마를 보자 기절해 버렸다. 명심씨는 딸의 ‘한국행’을 도울 사람들에게 딸을 인도하고 2시간 만에 헤어졌다. 아들은 보지도 못했다.

“10월에 국가정보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애들이 입국한 지 한 달 됐는데, 와서 애 상태를 보래요.” 엄마는 들뜬 마음을 안고 아이를 보러 갔다.

“그런데 주원이가, 다리가, 붙어 있었….” 엄마가 또 운다. 다리가 휠 정도로 무릎 연골과 마디가 자라나 버린 것이다.

며칠 후 수술 날짜가 잡혔다. 그런데 담당의사는 온몸에서 뼈마디가 자라난 X레이 사진을 보여주며 수술을 거부했다. 엄마는 울며불며 애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작년 11월 28일 오전 7시에 시작된 수술은 오후 2시30분에 끝났다. 그날 저녁 중환자실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세 가족이 재회했다. 두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던 아이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온몸을 떨었다.

해가 바뀌어 주원이가 퇴원했다. 주원이는 한 달에 한 번 천안 단국대병원 나들이를 제외하면 집을 떠나지 못한다. 몸이 더워져 하루 종일 옷을 벗은 채 누워 있다.

두 다리 무릎 아래에 큰 흉터가 있고 온몸 여기저기에 뾰족뾰족하게 뭔가 돋아나 있다. 연골과 마디들이 겉으로 솟을 정도로 자란 것이다.

한국에 와서 꼭 갖고 싶다던 롤러스케이트를 사줬다. 아이는 머리맡에 롤러스케이트를 놔두고 롤러스케이트를 탈 꿈을 꿨다. 그 모습이 너무 슬퍼서 엄마는 어느 날 롤러스케이트를 장롱 속에 숨겨 버렸다.

병원에선 임상실험을 조건으로 수술비와 주사비를 할인해줬다. 수술비 500만원은 탈북 주민의 국내정착을 도와주는 하나원에서 모아줬다. 월 1회 무통주사는 70만원이다.

주사를 맞으면 고통은 “어머니, 몸 위로 ‘벌거지’가 기어다녀”라고 할 수준으로 줄어든다. 주원이네 한 달 수입은 국민기초수급비 72만원과 쌀 구입비 2만원, 그리고 월 4회 가나안농군학교 강의료 40만원이다.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주원이가 보고 싶다. 조선일보 우리이웃 네트워크 단체 기아대책(02-544-9544·www.kfhi.or.kr)으로 주원이를 후원해주십시오. / 박종인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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