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성산(37) 감독은 4~5년 전엔 두 달에 한 번꼴로 파출소를 드나들었다. 울분 때문에 술(주량은 소주 두 병)에 빠져 있던 시절이라 곧잘 시비가 붙었단다. 2002년 아버지가 처형당했다는 비보(悲報)가 오히려 그의 삶을 바로잡아주었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예능계인 금성고등학교(‘휘파람’을 부른 가수 전혜영이 다닌 학교), 평양 연극영화대학 영화연출학과를 졸업했다. 개성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1994년 라디오로 KBS사회교육방송을 몰래 듣다 잠에 빠진 사이 발각이 됐고, 황해도 사리원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다. 국가보위부의 문서까지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13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한 달 후 호송차가 산길에서 구르는 틈을 타 탈출, 중국·베트남·홍콩 등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뮤지컬 ‘요덕 스토리’를 연출한 정성산 감독에게 전화를 걸면 통화 대기음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가 흘러나온다.

이 찬송가의 노랫말을 쓴 존 뉴턴은 바다에서 폭풍우에 휩쓸렸다가 기적처럼 살아나 목사가 됐다. 정 감독 역시 “나도 죽었으면 열 번은 죽었다. 살아서 공연 올린 게 기적”이라고 했다.

북한 1급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을 담은 뮤지컬 ‘요덕 스토리’가 보름 동안 2만여명의 관객을 모으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2일 폐막한다.

30일 오후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만난 연출가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2~3분에 한 번꼴로 울리는 휴대전화, 종이를 내밀며 사인을 부탁하는 관객, 공연의 상태를 점검하러 극장에 수시로 들락거려야 하는 사정 때문에 인터뷰는 뚝뚝 끊겼다.

―폐막한 다음날(3일)은 뭘 할 계획인가?

“잠을 자고 싶다. 그동안 하루 서너 시간밖에 못 잤다. 지금 내가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니다. 탈진 상태다. 휴대전화 끄고 시체처럼 잘 것 같다.”

―당신 인생의 드라마를 만든 게 잠 아닌가. 1994년 남한 라디오 방송을 틀어놓고 자다 발각돼 수용소로 끌려갔고, 기적적인 탈출도 당신이 잠든 사이 호송차가 전복되면서 가능했다.

“그렇다. 요즘도 가끔 내가 여전히 수용소에 있는 악몽을 꾼다. 꿈속 수용소 안에서 불야성을 이룬 서울의 밤을 바라보는 내가 보인다.”

―‘요덕 스토리’로 세상이 뒤집힌 느낌이다. 당신은 뭐가 달라졌나?

“전엔 술 먹거나 누굴 만나면 짜증부터 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왜 살아 있나 자문하며 비관했다. 작년 벌이가 400만~500만원밖에 안 된다. 몇 달 전까지도 휴대전화 요금 걱정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 공연을 하며 힘겨울수록 감사하는 마음을 배웠다.”

―감격의 절정을 느꼈던 순간은?

“3월 26일이 아버지 생신이었다. (울먹이며) 이 뮤지컬 노랫말에도 나오는데 진짜 우리 아버지 생신이다. 그전까진 기일을 몰라 생일날 혼자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바로 그날 표가 완전 매진됐다. 배우들을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

―1994년 북한에서 당신은 13년형을 선고 받았다. 올해가 13년째다.

“날 조였던 한(恨)으로부터 조금은 놓여난 심정이다.”

―한으로부터 조금은 놓여났다고?

“아버지는 2002년 나 때문에 처형당했다. ‘요덕 스토리’는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려고 만든 뮤지컬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포들의 한으로 목적이 바뀌었다. 이 공연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가 옆에 와 계신 것 같다. 북한의 죽은 영혼들도 어른거린다.”

―표가 없어 돌아간 관객이 많다. 나라 안팎에서 이만큼 주목을 받았으면 대성공 아닌가?

“시작일 뿐이다. 요즘도 기도한다. 1000만명이 보게 해달라고, ‘요덕 스토리’를 통해 수용소가 해체되게 해달라고. 초연의 성공은 도화선에 불과하다.”

―초연으로 흑자가 나나?

“안 난다. 제작비 7억원 중 후원금으로 충당한 2억원을 뺀 5억원은 매표로 메워야 하는데 수익이 날 구조가 아니다. 탈북자는 무조건 공짜였다. 이번에 진 빚은 서울 재공연과 지방 순회공연, 해외공연으로 갚을 수 있다. 자리가 없어 돌아간 분들은 4월 중엔 꼭 모실 거다.”

―연장 공연의 장소와 날짜가 잡혔는가?

“4월 18~19일 성남아트센터에서 4회 앙코르 공연을 한다. 5~6월엔 포항·수원·대전·인천 등의 지방 공연, 교회 순회공연 요청이 밀려들고 있다.

7월 이후엔 미국과 유럽 공연, ‘요덕 스토리’의 영화화도 추진 중이다. 폴란드 쪽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광장에서 공연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정성산’이 세 사람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당신은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이 뮤지컬을 완성시켰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진실이란 뭔가?

“두 가지다. 북한의 현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 그리고 현 정권의 대북정책이 잘못됐다는 걸 지적하는 것이다.”

―1994년 한국에 와서 겪은 일들이 떠오를 텐데.

“나만큼 파란만장한 탈북자도 없을 거다. 포장마차도 하고, 술집 삐끼(호객꾼)도 하고, 병원에서 시체도 닦았다. 그렇게 돈 벌어서 단편영화 찍었다. 험하게 살았지만 그래서 오늘이 있는 것 같다.”

―재공연에선 뭘 보완하는가?

“부실한 세트를 화려하게 바꾼다. 영화판에서 빌려온 의상들도 새로 제작할 거다. 장면을 더 장중하게 만들고, 탈북 과정을 영상으로 집어넣는 것도 생각 중이다.”

―이번에 보니 젊은 관객들이 많았다.

“나도 놀랐다. 월드컵 때 목격했듯이, 그럴 판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나라 사람들, 국가나 민족의식은 누구도 못 말릴 만한 에너지가 있는 것 같다. 난 객석에서 관객 표정을 훑는다. 초등학생 꼬마들도 지루해하질 않더라. 북한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으니 뿌듯한 일이다.”

―당신은 영화 학도였다. 2004년 크리스마스에 개봉할 예정이었던 영화 ‘빨간 천사들’은 어떻게 됐나?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긴 탈북보다 어렵더라. ‘빨간 천사들’은 남한에서 북한으로 큰 애드벌룬을 띄워 북한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다는 내용이다. 올해 6~7월 개봉을 추진 중이다. 판문점에서 시사회를 열고 싶다.”

―이번 공연에서 못 잊을 관객이 한둘이 아닐 것 같은데.

“힘내라고 곰탕 끓여온 할머니, 아무 말 없이 100만원 봉투를 찔러주고 가신 할아버지, ‘건강검진비를 대겠다’는 기독교인들, ‘나도 통장 있는데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고 묻는 초등학교 꼬맹이들…. 너무 많다.

어느 60대 노인은 1막 중간에 뛰쳐나와 날 부여잡고 우시길래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납북된 동생 생각에 도저히 볼 수가 없다’ 하시더라.”

―당신은 숱한 위협과 협박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어디로 가는가?

“매일 이 공연 보며 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내가 죽어도 이 공연은 계속 갈 것이라 안심이다. 이한영이 피살됐는데, 나 죽으면 ‘요덕 스토리’가 순식간에 세계적인 작품이 될 거 아니냐. 감사하며 살겠다.”

―서른일곱 노총각이다.

“결혼할 시간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고, 아버지 한부터 풀어드리려고 했다. 이제 장가가고 싶다. 올 가을에 간다. 4년을 기다려준 여자친구가 있다. 탈북자는 아니다.”

/글=박돈규기자 coeur@chosun.com
/사진=채승우기자 rainm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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