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미관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이슈를 세 가지 들라면, 비자면제협정, 자유무역협정(FTA), 반기문 외교부장관의 UN사무총장 출마를 꼽겠다. 산뜻하다. 지난 몇 년 북핵, 주한미군 감축, 이라크 파병 등에 치여 다른 문제는 엄두도 못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이슈를 앞세우다니, 우리 외교가 드디어 실용과 실리를 중시하는 외교로 변신하려는 것일까.

이 현안들은 국내 정치적인 가치도 높다. 진보든 보수든, 친미든 반미든 싸우며 반대할 이유가 별로 없는 사안들이다. 실패했을 경우 정치적 부담도 크지 않다.

‘되면 좋지만, 안 돼도 누가 뭐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하면 역대 어느 ‘친미정권’도 못한 실리적인 성과가 될 것이며, 실패하면 자국의 이익만 앞세우는 미국을 비난하면 된다.

시선을 워싱턴으로 돌리면, 요즘 미국은 이란 핵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금까지 부시 행정부의 외교는 ‘악의 축(Axis of evil)’과의 지루한 싸움이었다.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이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이라 부른 이래, 이들 국가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전쟁하고 협상하는 것이 미국 외교의 절반이 넘었다. 그런데 지금 성적표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먼저 이라크. 다른 국가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군사공격을 감행한 직후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러나 부작용과 합병증이 초기 성과를 무색하게 할 만큼 악화되면서, 이라크는 이제 미국의 힘과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변했다.

북핵 문제 역시 6자회담을 통해 노력은 했지만, 성과는 없었고 해결에 대한 기대도 줄어들었다. 앞으로 또 한 번의 6자회담이 열린다 해도 워싱턴에서 ‘만남’ 그 자체에 기대를 걸 사람은 별로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 핵 문제까지 계속 악화된다면?
이란은 산유국이다. 이란 핵 문제를 잘못 다루면 세계 에너지 수급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란은 미국이 전쟁 중인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이라크에서 고전하는 미국을 더 괴롭게 만들 수 있다.

이라크 문제로 국제적인 신뢰를 잃은 미국이 섣불리 강경책을 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란은 그래서 큰 소리 뻥뻥 친다.

이란 때문에 미국의 북핵 문제 해결의지는 더 식었다. 요즘은 북한 담당 주무 부서가 아예 국무부에서 위폐문제를 다루는 재무부로 옮아간 것 같다. 북핵 6자회담의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다른 일에 전념하고 있다고 하고, 조지프 디트라니 대북협상특사 후임자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라면, ‘미국이 북핵 문제에서 손 뗄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미국이 어느 날 갑자기 ‘이제부터 당신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면한 복잡한 현안들이 북핵 문제의 우선순위를 점점 더 떨어뜨리면서 미국이 북핵 문제에서 손을 뗀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올 수는 있다.

그러면 악몽의 시나리오가 된다. 미국이 북핵문제에 관심을 쏟을 수 없는 기회를 틈타 북한은 슬금슬금 파키스탄식으로 핵국가가 되려 할 것이다. 게다가 한미 양국은 앞으로 치러야 할 크고 작은 선거 때문에 북핵 문제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기만 하지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정신 차려 보니 핵을 가진 북한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면? 우리 외교 담당자들이 비자면제와 FTA 협정을 가까운 장래에 성사시키지 못했다고 ‘역사의 죄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후 해결 못한 북핵 문제 때문에 청문회가 열린다면, “2006년에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비자면제도, FTA도, UN사무총장도 다 좋다. 하지만 그것이 지상 최고로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말하지 말자. 정권은 짧고 국익은 길다. /강인선 워싱턴특파원 insun@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