田奉根·외교안보연구원 안보통일연구부장

1997년 8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착공식을 개최한 지 8년4개월 만에 KEDO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경수로사업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 경수로사업 인원들이 8일 금호 현장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이다.

1997년부터 경수로사업 초기에 3년 반 동안 KEDO 뉴욕사무국에서 근무한 필자로서는 이번 사태를 보는 감회가 남다르다. 당시에는 남북대화가 거의 없었고, 북한에 대한 정보도 극히 제한되었다.

그러나 경수로사업을 통해 수백명의 남측인원들이 수시로 북측인사들과 접촉하면서 남북대화의 말문을 트고, 평양과 지방을 방문하면서 북한의 ‘속모습’을 알게 되었다.

캄캄한 평양, 1월의 난방 없는 묘향산 호텔, 폐허 같은 공장지대, ‘흙포장’의 지방간선도로, 중학생 정도로 왜소해 보이는 군인들, 빈약한 농작물, 유리창 없는 기차, 트럭 위에 산적한 인간 화물 등이 필자가 본 북한의 이미지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30~40년을 거슬러 갔다가 타임머신을 탄 ‘백 투 더 퓨처’의 여정이었다. 돌아오면 몇 주일은 식사시간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기억도 있다.

사실 경수로사업은 남과 북이 서로를 들여다보는 창이었다. 한국은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난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계기를 찾았다.

남북정상회담도 그 결과로 볼 수 있다. 한편, 북한은 경수로사업에서 남북경협의 가능성을 보았다. 경수로사업은 금강산관광사업과 개성공단사업의 원형을 제공하였다.

그렇다면 경수로사업은 과연 수조원의 가치가 있었던 사업인가? 우선 우리 정부가 투입한 11억달러가 회수불능이 되었으며 2억달러의 청산비용이 추가로 들고, 450억원 상당의 기자재가 압류된 것은 유감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KEDO 경수로사업 참여는 미국의 요청 때문에, 그리고 북핵위기 해소를 위해 불가피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10여년간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였으며 대북 다자협력의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또한 탈냉전기 새로운 남북관계의 창출과 ‘민족경제공동체’ 구축이라는 국가목표를 위한 대북전략의 일부로서 가치도 있다.

필자는 경수로 본공사가 시작된 2000년에 경수로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4개 의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협정과 계약의 충실한 이행, KEDO 이사국의 정치적 지지 유지, 북핵 투명성 확보, 경수로 수용태세 완비 등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북한은 4개 조건을 만족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첫째, 북한은 종종 협정과 계약을 위반하여 경수로사업을 위협하였다. 갑작스런 임금 6배 인상 요구, KEDO의 독자통신망 사용 거부 등이 그 예이다.

둘째, 북한의 동해안 잠수함 침투와 미사일 발사실험으로 공사가 중단되는 사태도 있었다. 미 공화당의 경수로 제공 반대도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이었다.

셋째, 북한의 핵투명성이 의심받는 한 국제법에 따라 경수로 기자재, 기술, 핵연료의 대북 이전은 불가능하다.

넷째, 북한은 경수로의 안전에 필요한 각종 기술적, 법적 요건을 충족시켜야 하나, 북한의 낮은 국가신용도와 경제력 때문에 이것도 거의 불가능하였다.

결국 북한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정상국가가 되어야 경수로를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조건들은 미래의 대북 경수로사업에도 역시 적용될 것이다. KEDO 사업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6자회담의 틀 내에서 금호현장을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6자회담에서 대북 경수로사업을 재추진할 경우, 이미 15억달러가 투입되고 공정의 3분의 1이 끝난 KEDO 경수로를 재활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사현장에 대북 이전이 통제된 기자재도 다수 있을 것이므로 6자회담은 이에 대한 관리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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