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 북측 최고당국자의 참여를 타진해볼 때가 됐다.(지난 9월22일 정동영 장관)” “북한 관료 초청은 책임 있는 정책 당국자의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지난 8일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이 18일부터 부산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에 북한 고위관리를 초청하는 문제를 놓고 심각한 엇박자를 보이고 있다.

노 대통령은 8일 청와대에서 가진 서울 상주 외신 지국장 초청 오찬 간담회에서 ‘APEC 때 북한 고위관리 초청이 이뤄지느냐’는 물음에 “북한 관료 초청은 책임 있는 정책 당국자 쪽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언론계나 시민 차원에서 제기한 아이디어 수준이라고 생각한다”며 “실현되면 참 좋은 일이지만 실현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APEC 정상회의에 북한 관료를 초청하는 것을 제안하고 추진한 게, 과연 언론계나 시민단체였던가. 그렇지 않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정동영 장관이다.

정 장관은 지난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 참석해 “APEC 정상회의 전에 6자회담을 통해 북핵문제의 실질적 진전이 이뤄지고, 정상회의가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선언하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며 “이 축하의 자리에 북한의 지도자가 참석하기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북한의 지도자’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의미한 것이란 분석이 유력하게 제기됐다. 당시 ‘정동영 장관, APEC 정상회담에 김 위원장 초청’이라는 보도가 매체들을 뒤덮었다.

정 장관은 또 지난 9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통일부 국정감사에서도 “APEC 정상회의에 북측 최고 당국자가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하는 문제를 미국 등 회원국들과 사전 협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열린우리당 최성 의원의 “APEC 정상회의에 북한 지도부를 초청했거나 초청할 계획이 있느냐”는 물음에 이 같이 답했었다. 이런 정황들을 감안하면 고위급 북한 관료를 APEC 정상회의에 초청하자는 것은 순수한 ‘정동영표 아이디어’인 셈이다.

노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알고도 “책임 있는 정책 당국자의 아이디어가 아니다”란 발언을 한 걸까. 논란이 일자 청와대가 서둘러 해명에 나섰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9일 “노 대통령이 몰라서 말한 게 아니라 정부 당국자도 말했지만 정책 차원의 시도는 아니었다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특별한 정치적 의도를 덧붙이지 말아달라는 주문도 있었다.

하지만 납득하기 쉽진 않다. 몰라서 말한 게 아니라면서 ‘언론계나 시민 차원에서 제기한 아이디어 수준’이란 말은 왜 덧붙인 걸까. 실은 잘 몰랐던 것이라면 국정 최고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남북관계 주무부서의 최고 수장이 꾸준히 추진해 온, 그것도 스케일이나 중요성 면에서 매우 중대한 사안에 대해 대통령이 말 실수를 했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그만큼 국정 운영이 꼼꼼하지 못하다는 뜻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청와대의 해명처럼 정말 알고도 그렇게 말한 거라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이 경우 일각에서 제기해 온 ‘정동영 견제설’이 다시 고개를 들 법하다.

이런 기류는 사실 이전부터 일부 감지돼 왔다. 정 장관이 다보스포럼을 마치고 귀국하다 예정에 없이 자이툰 부대를 방문했을 때, 여당 일각에선 이를 ‘대권행보’라며 경계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난 해 12월 2일엔 정 장관이 “내년에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밝혔지만, 같은 날 영국 런던에 있던 노 대통령은 “북핵 6자 회담 진행 중에는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북한 지도자를 초청한 정 장관의 다보스포럼 발언에 대해서도 당시 청와대는 “사실 무근”이라고 일축했다. 지난 7일엔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지난 달 10일 국회에서 밝힌 ‘남북협력공사’ 설립 방안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신중하게 추진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를 놓고 ‘사실상 보류 지시’ ‘정 장관 견제 의도’란 분석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노 대통령의 이번 언급도 이 같은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일까. 그렇다면 대통령은 정 장관이 ‘책임 있는 정책당국자’가 아닌, ‘무책임한 정책당국자’이라고 생각했다는 걸까.

물론, 이번 일 역시 그저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봐 넘길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의 애매한 말을 놓고 논란이 일어 청와대가 급히 나서 뒷수습하는 건 낯선 풍경은 아니다. 발언의 진의는 당사자인 노 대통령이 가장 정확하게 알 것이다. /남승우기자 seraphc@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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