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재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참패했다. 그러나 이것 하나로 사회적인 추세가 ‘2002 노무현 현상’ 이전이나 그 반대 쪽으로 선회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지금의 우리 사회 분위기로는 ‘2002 노무현 현상’ 같은 것이 2007년에도 얼마든지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분위기란 한마디로 “세계가 우(右)로 가고 있는데, 한국만 좌(左)로 가고 있다”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보면, 2007년도 2002년의 재판(再版)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1980년대 주사파와 마르크스혁명파는 소련권 붕괴와 북한 기아(饑餓) 사태로 급속히 쇠퇴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 사회는 여전히 ‘좌’로 쏠리고 있는가? 그것은 왕년의 386 투사들에게 부채(負債) 의식을 가지고 있는 오늘의 40대 화이트칼라들, 그리고 상당수 20대 ‘전교조 세대’와 30대가 일종의 광범위한 ‘중간 회색지대’를 이루면서, 2000년대 ‘좌’의 마지막 상품인 ‘반(反)세계화’ ‘반미(反美)’ ‘민족주의’에 호의적 가산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사이엔 “남·북한의 체제 경쟁은 끝났다. 그러니까 반북(反北) 대결은 수구냉전 꼴통이다” “강자(强者) 미국을 배척하고 약자(弱者) 북한을 편들어 ‘우리민족끼리’ 해야 한다” 운운하는 담론이 먹혀들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들이 장벽 저쪽의 김정일 폭정(暴政)엔 둔감한 채, 눈앞의 남쪽 ‘기득권 보수’가 싫은 이유에 더 민감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 정서를 ‘좌’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 교묘하게 부채질하고 있다. “일류 대학 안 나온 사람들, 서울 강남에 안 사는 사람들, 재벌 아닌 사람들, 미국인보다도 더 영어 잘하는 축에서 빠진 사람들은 ‘배 아프면’ 다 모여라”고 하는 선전선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회색지대를 향해 “반(反)세계화하면 먹고 살기가 더 어려워지지 않겠는가?” “성장 없는 분배는 국가 채무만 늘리지 않는가?” “김정일 폭압은 ‘약자니까’ 눈감아주자면서, 그 폭압으로 신음하는 ‘더 약한’ 북한 주민, ‘더 약한’ 탈북자 인권에는 왜 무관심한가?” “민족주의만 내세우면 수용소 정권도 ‘묻지마’ 인가?” “대한민국 57년사는 ‘민족 분열’로 깎아내리고, 북한 57년사만 ‘민족 자주’로 치켜세우면 ‘우리민족끼리’ 화해가 과연 되겠는가?” 하고 물으면 그들의 답변은 때로는 궁색, 때로는 얼렁뚱땅, 때로는 궤변이다.

그럼에도 이 ‘중간 회색지대’는 “북한은 크게 문제될 게 없고, 미국과 남한 쪽 기득권 보수가 더 문제다”라는 유행가에 타성적으로 습관화돼 있다.

‘불량품이지만 잘 포장된’ 그런 ‘좌’ 상품들이 구호로, 영화로, 연극으로, 노래로, 매스컴으로, 베스트셀러로, 촛불로, 데모로, 이벤트로, 퍼포먼스로, 동료집단의 사회화로, 그리고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모습으로 그들의 구매욕을 끌어간 탓이다.

이렇게 대중적 패션을 주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좌’ 문화는 소수 ‘좌’만의 것이 아닌 다수 ‘일반’의 것으로 퍼질 수 있었다.

심지어는 그렇지 않은 지식인과 정치인까지도 인기와 밥벌이와 보신(保身)을 위해서 ‘생계형 좌파’ ‘좌파 상업주의’로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중간 회색지대’가 ‘좌’ 패션에만 익숙해져 있고, 주눅들어 있고, 길들여 있으면서, 그 반대쪽 자극은 못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세력’이 자문해야 할 것은 자신들에게 예컨대 ‘탈북자 강철환’ 이야기를 ‘웰컴 투 동막골’보다 더 매혹적인 영상물로 만들 능력과 재주가 있느냐 하는 물음이다.

앞으로도 계속 밀리고 당하고 싶지 않다면, 그리하여 잃어버린 ‘중원(中原) 땅’ 고객들을 되찾으려면, 그들은 마땅히 ‘좌’보다 더 우량한 감동 상품, 문화 상품, 지식 상품을 생산해내고 마케팅할 수 있어야만 한다.

문화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정치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정치적 헤게모니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쪽이 얻게 되는 과실(果實)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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