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吉在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

지금부터 60년 전 평양에선 ‘조선공산당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조선공산당 북부조선 분국(分局)’의 수립을 결정하였다.

비록 서울에 조선공산당 중앙이 존재하지만 남한에 미군정이 성립되어 활동에 제약이 있으므로 평양에 그 분국을 두기로 한 것이었다.

말로는 ‘분국’이지만 오늘날 북한이 이 대회가 개최되기 시작한 날인 10월 10일을 조선노동당 창건일로 삼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도 그것은 사실상의 ‘당 중앙’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조선노동당은 비록 조직적 기반은 미약했지만 상승하는 기류를 탔고 그 여세를 몰아 북한을 장악하고 분단 저편에 하나의 강고한 국가사회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조선노동당은 300만명이 넘는 당원과 중앙에서 지방까지 뻗쳐져 있는 세밀한 조직망 등 조직적 기반은 강할지 모르지만 하향(下向)의 기류를 타고 있다.

경제난은 개혁·개방을 수반하지 않고는 회생의 기미가 없고, 국제사회에서는 고립의 상태에 처해 있다. 그나마 중국과 남한의 지원이 없다면 국제미아나 다름없다.

리더십은 ‘인민’들로부터 자발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고, 당은 심각한 관료주의 병폐에 시달리고 있다. 당대회는 1980년 6차 당대회를 끝으로 4반세기 동안 개최되지도 못하고 있으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조차도 작동하고 있다는 어떤 징후도 없다.

인민들 사이에서 당원이 된다는 것은 매력 없는 일이라는 얘기도 들려온다.

그런데도 10월 10일 5·1경기장에서 열린 60주년 중앙보고대회에서 ‘선군(先軍) 사상’과 ‘강성대국’ 건설을 강조했다니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꼴은 말이 아닌데 아직도 강성대국 운운하고 있으니 북한 아니면 찾아 볼 수 없는 허장성세의 표현이다.

그러나 김정일이나 당 지도부로서도 고민의 흔적은 있다. 북핵 문제를 기화로 미국과 관계개선을 하고 받을 건 최대한 받고자 했지만 미국의 강경입장으로 9·19 공동성명 정도로 타결의 모양새를 갖출 수밖에 없었고, ‘아리랑’ 공연을 다시 조직해서 남한과 외부 관광객을 끌어모아 그나마 빈약한 외화 창고를 채우려 했다.

개혁과 개방을 하자니 체제 내부에 미칠 부정적인 파급 효과가 두렵고, 남한과의 폭넓은 교류·협력으로 60년 동안 우습게 봤던 남한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이 바뀌는 것이 염려된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해서 갈 수도 없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오늘날 노동당과 김정일이다.

그렇지만 북한체제가 조만간에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주민들이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이들 간에 의사소통이 이뤄질 수 있는 사회적인 망(網)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위에 당과 국가안보기구들의 꽉 짜여진 조직망이 있으니 ‘공안(公安)국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요즘 북한의 후계 문제가 종종 거론된다. 세 아들 가운데 누가 유력하다느니 하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핵심은 누가 유력한가보다는 후계구도가 북한의 정책방향과 체제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이다.

세 아들의 성향과 세력기반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이 누가 될 것인지를 점치는 것처럼 공허한 일도 없다. 다만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이 계속된다면 누가 되든 후계 시점에서 북한체제는 커다란 변동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내구성과 취약성이 공존하는 나라, 북한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북한을 머리에 이고 가야 하는 우리의 운명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논의의 장이 우리 내부에 제대로 이뤄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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