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浩烈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얼마전 2단계 제4차 6자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짐을 꾸리는 미국 외교관에게 회담 전망을 물었더니 경수로가 관건이라면서 북한이 경수로를 협상용으로 제기하면 문제가 풀리겠으나 경수로 자체를 우선 고집하면 회담은 결렬될 것이라고 하였다.

추석 연휴기간에 북경에서는 6자회담이 성공적으로 타결되어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그 미국 외교관의 말대로라면 북한이 경수로를 협상용으로 제기했든지 아니면 미국이 회담 기간 중 전격양보했든지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경수로 문제는 회담 기간 내내 가장 큰 난제였다. 모호한 표현이지만 합의에 이르렀다는 소식은 상당 수준의 이면 협상이 이루어졌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회담 성과에 대한 우리 정부 주무 장관의 공식발표 역시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서 완전하진 않으나 향후 이행 과제들에 관심을 쏟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회담 직후 국내외 언론들에 따르면 북한을 제외한 참가국들은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권은 북한의 핵포기 약속이 이행되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에 이해를 같이했다고 하였다.

동시에 경수로 문제는 북한이 NPT에 복귀한 후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통해 핵투명성이 확보되는 등 신뢰가 구축되어야 제공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대로 합의문에 경수로 관련 문구를 삽입한 연유이다.

그러나 6자회담에서 발표된 합의사항의 이행을 위한 후속 조치가 논의되기도 전에 보도된 북한 외무성의 ‘선(先) 경수로 제공’ 발표는 이 같은 기대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참가국들의 배경 설명과 북한 외무성 발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북핵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선 새로운 위기가 조성될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이다.

북한 외무성 발표는 회담 직후 워싱턴에서 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합의문의 모호한 표현을 핵문제 해결 수순에 입각하여 명확히 발표한 것에 대한 도발적 반응이다.

북한은 미국이 요구하던 선(先) 핵폐기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미국이 북한이 요구한 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핵개발을 지속하겠다는 초강수의 벼랑끝 전술을 재연한 셈이다.

북한으로선 일차 합의문 도출을 이끌어내곤 이를 근거로 양보는 물론 새로운 전략적 선택도 하지 않고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선언을 한 셈이다.

협상보다는 교묘한 전술을 동원한 입장의 관철이자 궁극적으로 핵 보유국으로서의 미국을 상대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윈·윈’의 게임이 아닌 ‘제로 섬’ 또는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의 사활(死活)을 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수를 띄웠다.

이에 대해 현재로선 더 이상 미국의 추가양보는 없을 것이고 어렵사리 중재에 성공하여 공동성명을 이끌어낸 중국으로서도 북한의 주장을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한국 정부는 이번 회담에서 대북 송전(送電)이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경수로 관련 문구를 합의문에 포함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외교의 성공이라고 자평하기에 앞서 평화적 핵이용권과 경수로 제공건과 관련하여 북한 전술에 넘어갔는지 아니면 북한을 대신하여 미국을 설득하였다면 향후 우방국 미국과의 신뢰 전선에 이상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냉철히 점검하여야 한다.

북한의 강경 입장을 또다시 예견 가능하고 조절 가능하다는 낙관적 기대를 갖고 섣불리 문제 해결에 나선다면 북핵문제의 해결도 한반도의 평화도 보장할 수 없다.

6·15 공동선언 이후 북한을 상대로 수백 차례 회담을 했다는 우리 정부가 아직도 북한의 협상 행태나 전략전술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대북 송전과 경수로 제공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