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2단계 제4차 6자회담에서 타결된 6개항의 공동성명은 1994년 체결된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와 여러 측면에서 대조적이다.

제네바 합의문 체결 당시에는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가정이 전제가 됐다면 6자회담은 북한의 생존을 전제로 한 ’빅딜’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 회담 방식 = 제네바 합의문이 북-미 양자회담 방식으로 타결됐다면 6자회담공동성명은 핵문제의 협상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북한과 미국을 포함한 남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 6자간의 협상의 산물이다.

제네바 회담과 같은 양자협상은 어느 한 쪽이 약속을 깨면 합의사항이 백지화되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북측이 제네바 합의 이후에도 핵개발을 지속해 온 만큼 먼저 합의사항을 어겼다고 주장하고 있고, 북측은 2003년까지 200만㎾의 경수로를 제공하지 않았고 경수로 완공 때까지 연간 중유 50만t을 주기로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미측이 합의문을 먼저 파기했다고 맞서고 있다.

미국이 양자방식을 거부하고 다자간 협상 방식을 좋아한 이면에는 책임을 여러 나라와 나누고, 결렬시 다자틀을 이용해 북한을 압박하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었지만, 적어도 표면적인 이유는 그 같은 양자방식의 허점 때문이다. 현재 북-미 기본합의문은 사실상 백지화된 것이나 다름없다.

◇ 의제 = 제네바 합의문이 북한의 핵 시설 동결과 보상에 중점을 뒀다면 6자회담 공동성명은 북한의 핵무기와 핵 관련 프로그램을 모두 폐기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제네바 합의문은 북한이 흑연감속로를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경수로 및 중유를 제공하고, 정치.경제적 관계정상화를 이룬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제네바 합의문을 통해 경수로와 중유 공급 문제를 전담하는 국제 컨소시엄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출범했다.

반면 6자회담 공동성명은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의 비핵화 실현과 북미ㆍ북일 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동북아 안보 및 협력 방안 강구 등 포괄적인 의제를 담고 있다.

윤 황 선문대 북한학과 교수는 “제네바 합의로 대북 에너지지원기구 KEDO가 출범했다면 이번에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를 위한 포럼을 구성하기로 한 것이 주요한 차이”라고 지적했다.

◇ 대북인식 = 미국은 제네바 합의문 체결 당시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만큼 합의사항 이행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994년 북한의 핵시설 단지인 영변을 폭격하려던 계획을 한국 몰래 세운 것은 미국의 대북 인식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하지만 6자회담에서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권한을 보장하고 참가국 모두 대북 에너지 제공의지를 명확히 한 것은 참가국들이 기본적으로 북한 정권이 단기간에 붕괴하지 않고 ’생존’할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특히 미국은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략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것도 달라진 대북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 경수로 = 제네바 합의문과 6자회담 공동성명은 표현에서 차이가 있지만 대북 경수로 제공 문제에 관련한 문구가 담겨 있다.

6자회담 틀내에서 새로운 경수로를 요구한 북측에 대해 미측이 단호히 거부를 하면서 결렬 위기로까지 치달았던 회담은 비록 애매한 표현이지만 ’경수로’란 단어를 공동성명에 집어넣으면서 극적 반전을 이뤘다.

참가국들은 “적당한 시점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하는 선에서 조율을 마쳤다. 추후 ’적당한 시점’을 정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북측으로서는 사실상 ’빅딜’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 남한의 중재 = 북측은 제네바 합의문 체결 당시 철저히 ’통미봉남’(通美封南) 원칙으로 임했지만 6자회담 때는 ’통한통미’(通韓通美)로 전략을 바꿔 남한의 중재를 적극 수용했다.

북한은 특히 남한이 200만㎾의 전력을 제공하겠다는 ’중대제안’을 6자회담 공동성명에 담은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남측 입장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7 면담’은 그런 북한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북한은 1992년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서 탈퇴한 뒤 1993년부터 미국과 마주한 세 차례 고위급회담에서부터 1994년 제네바 합의문 타결 때까지 남한을 배제했다.

◇ 과거.미래 핵 = 북한의 흑연감속로 동결에 치중했던 제네바 합의 때는 이전에 추출된 플루토늄 등 ’과거 핵’ 문제는 폐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북한은 1992년 5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이전에 추출한 10∼14㎏의 무기급 플루토늄으로 핵무기 1∼2개를 제조했을 것으로 미국 정보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6자회담 공동성명에서는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기로 약속해 포기 대상을 ’과거의 핵’까지 명시했다.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면 더 이상 핵무기를 제조할 수 없게 되어 자연스럽게 ’미래 핵’까지 없어지는 효과를 얻게 된다.

또 공동성명에 1992년 발효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의 실효성을 명기한 것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EU) 폐기와 비농축을 강제할 것을 염두에 둔 것임은 물론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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