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의 평양 무대―청중은 통제된 반응으로부터 너도 나도 모르게 서서히 풀려나가 감동의 회오리에 몰아치는 과정이 그동안 억눌려 있던 민족 원형질을 터뜨리는 것 같아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중국정사인 「이십오사(二十五史)」의 많은 기록들에서 고대 한국인의 공통항 하나만을 고르라면, 어울리면 노래하고 춤춘다는 낙천기질을 들 수 있다. 얼마나 가무(歌舞)를 즐겼기로 또 그것이 얼마나 이색적으로 보였기로 가장 두드러진 고대 한국인의 기질로 적어 남겼을까 싶다.

이 가무가 삼국시대의 동맹(東盟) 영고(迎鼓)등 신(神)맞이 종교행사와 맥락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밀접하다고 보여진다. 정상상태에서 신들리는 상태, 곧 신빙(神憑) 수단으로써 춤과 노래가 발생 발달했으며 한국인이 체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이 신빙에 적성이라는 민족 원형질이 고대 이래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샤머니즘 이후에 형성된 불교나 유교 기독교는 욕망을 자극한다 하여 가무를 천대·억제한 채로 통일신라 고려 조선조가 꾸려져왔지만 이 가무 원형질은 잠재된 채 틈만 생기면 돌출하여 사회문제가 되곤 했다.

조선초기 상류층에 여진답무(女眞踏舞)라 하여 요즈음 디스코춤보다 야한 가무가 번졌었다. 당시 정승이던 어유소(魚有沼)는 이 답무를 잘 추기로 소문 났으며 여염집들에서 이 춤에 빠져 집에 도둑이 들고 불이 나도 몰랐을 지경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무 향락을 억제하는 유교사회의 빈틈에 노출된 역동적인 민족 원형질이 아닐 수 없다.

원효대사가 이론불교의 대가이면서 민중을 교화하는 데는 목탁으로 가무화한 염불불교를 몸소 솔선한 것도 바로 한국인의 심정속에 잠재돼 있는 이 원형질에 영합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에서 순교한 베르뉘 주교는 한국인의 신앙성격을 두고 교리를 이해하려 들지 않고 그저 주기도문을 원문으로 외우고 찬송가를 신들리게 부르는 것으로 종교적 만족을 구하며 어떤 희생도 무릅쓰고 태연히 순교에 임했다 한다.

민족 원형질의 종교적 도출을 그에서 보는 것 같다. 일전 일본 아사히 신문은 일본이 원조인 가라오케가 40만대인데 한국의 노래방기계는 60만대로 「원조를 넘어선 노래 대국」이라고 보도한 데서도 이 원형질이 노출되고 있음을 본다. 조용필은 평양에 가서 억눌렸던 그 민족 원형질을 터뜨리고 왔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