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북한인권보고서 “탈북자 75% 공개처형 직접 목격”

“(임산부가) 아기를 낳으면 안전원들이 아기를 코가 땅에 닿게 엎어놔요. 애가 살겠다고 버둥거려도 엄마는 가슴을 쥐어뜯고 울면서 애가 죽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건강한 아기는 3~4일, 보통은 이틀 울다 죽어요. 그러면 안전원들이 들어와서 ‘이렇게 애가 우는 과정을 봐서라도 중국엔 다신 가지 말라’ 그래요”

북한에서 유치원 교사를 하다 탈북한 A(여·55)씨가 들려준 북한 탈북자 수용소 실태는 참혹했다.

지난 7월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로 동국대 북한학연구소가 북한인권실태를 조사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북한정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를 잠시 보류하기로 해 물의를 빚은 것으로 알려진 보고서다.

남북 관계 개선은 물론 중요하지만, 2005년, 지구상에 이런 ‘인권 부재(不在) 국가’가 있나 싶을만큼 충격적인 내용을 보고서는 담고 있다. 논란이 된 보고서의 보다 상세한 내용을 조선닷컴은 보도한다.

조사를 맡은 동국대 북한학과 고유환 교수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탈북자 50명을 심층 인터뷰하고 탈북자 교육기관인 하나원에 수용된 탈북자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 굶주리다 죽어가

“아기들은 보통 (태어난지) 보름이 안 가서 죽고, 노인들은 영양실조 때문에 얼굴이 헐어요. 그래서 얼굴에 쇠파리가 앉고 구더기가 끼고…굶어 죽었다고 봐야 하는지 균이 들어가 죽었다고 봐야 하는지, 그런 실례가 많아요”

함경북도에 살던 B씨(여·54)처럼 “굶어죽은 사람을 직접 봤다”고 증언한 탈북자는 전체의 64%다. 26%는 ‘굶어 죽은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답했다. 직간접적으로 아사자를 목격한 경우가 90%에 이르는 것이다.

식량난 때문에 가장 고통을 당하는 연령대는 노인과 아동이었다. 특히 아이들의 생존권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이른바 ‘꽃제비’라고 불리는 떠돌이 아동들은 굶주림으로 집을 나오거나, 또 부모가 굶주림으로 사망해 시장을 떠돌며 구걸 행각을 하다 길거리에서 사망하기도 한다고 탈북자들은 증언한다.

“시장 가서 (음식) 사먹으면 사먹는 사람이 가슴이 떨러요. ‘한 입만 달라고’ 덮치는 ‘한 입 떼’가 몰리고…국수 파는 곳에서 국수 물이라도 달라고 아이들이…그 물이라도 먹겠다고,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어요” (여·53 주부, 1998년 5월 탈북)

한국을 포함해 외국에서 지원된 쌀은 모두 간부들에게 돌아갔다는 증언도 나왔다. C씨(70)는 “남한이나 외국에서 지원된 쌀은 인민들한테 1kg도 돌아오지 않았다.

(지원된 쌀이) 군에 많이 가고 안전부 보위부 검찰 등의 간부들에게 다 주고 나면 인민들은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1999년~2000년에 탈북한 탈북자들은 모두 “남한 및 외국의 식량 원조 사실을 몰랐다”고 답하기도 했다. 북한 정부가 국제사회의 대북지원 사실을 숨겨왔음을 알 수 있다고 보고서는 설명한다.

◆강제 낙태와 인신매매

탈북과정에서 또는 제3국으로 체포됐다가 북한으로 송환된 여성탈북자 중 3%는 직접 강제 낙태를 당했다고 대답했다. 21%는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 인신매매를 경험하거나 인신매매를 당하는 여성을 봤다는 응답도 83%에 이르렀다.

A씨(여·55)는 자신의 두 딸이 모두 유흥업소에 팔려간 경우라고 했다. “둘째·셋째딸이 중국 친척집에 가서 도움을 좀 얻으러 가는 길에, 조선족에게 잡혀서 팔렸어요.

중국돈으로 4500원씩에. 소식이 안닿길래 혼자 (딸을 보기 위해) 밤에 강을 건넜어요. 친척집에 가서 기다리니 1998년 2월21일에 소식이 왔는데, 걔들이 ‘왕청 다다구’란데 팔려가 있다고…”

또한 A씨는 수용소에서 행해지는 강제낙태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탈북하다 잡힌 임산부들은)낙태를 시키죠. 더러, 배를 막 발로 차가지고. 병원에 약이 없으니까, 중절시키는 약이 없으니까 배를 차서 8개월짜리 아기는 조산되고, 4개월짜리 애기는 유산되고… 그런 일이 한 달 동안 있었어요. 말도 안되죠”

◆공개처형과 나체조사

탈북자들이 들려준 인권유린 실태 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탈북자 수용소인 무산보위부·청진도 집결소, 양강도 혜산시의 ‘927사무소’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무산보위부에 처음 잡혔을 때 옷을 아예 다 벗기고 손을 머리에 얹고 앉았다 일어나는 것을 50번 반복하거든요. 왜 이런 걸 하냐고 옆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이렇게 하면 항문이나 자궁에 (감춰놓은) 돈 넣은 것이 나온대요.”

당 지도부를 했다는 D씨(여·43)가 증언하는 ‘927사무소’ 실태에 대한 얘기이다. “아침마다 5~6명이 굶어 죽어서 나가요.

입고 있던 일제 가죽점퍼 주면 보내준다고 해서 다행히 나올 수 있었어요. 이런 사회주의가 제일이라며 한 때 마이크를 쥐었던 게 너무 혐오스러워 이 땅에 다시는 발길을 돌리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927 사무소’는 9월27일에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으로 탈북했던 이들을 수용해 ‘교양학습’을 시킨 후 고향으로 보내라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탈북자의 75%는 ‘공개 처형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소문을 들었다’고 답한 탈북자는 17%였다. E씨(45)는 “1998년 4개월 동안 내가 본 것만 20∼30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여성차별과 아동학대

북한은 1946년에 남녀평등법을 만들었지만 실제 북한여성들은 가정과 직장에서 심각한 차별과 인권침해를 겪고 있었다.

화학공장 노동자로 일했던 F씨(여·36)는 “여자가 밥을 먹지 못해 아파도 발로 차며 나가서 돈 벌어오라는 것도 자주 벌어지는 일”고 밝혔다.

성폭력도 빈번하게 용인되고 있었다. A씨는 “여자들도 당원이 되면 노임이 높아진다. 그걸 알고 당비서들이 ‘한번 자자’며 접근해, 실제로 당한 여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아동의 24%만 학교에 가고, 50% 이상이 강제노동에 동원된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모내기, 추수같은 농업은 물론 건설현장에도 끌려간다는 게 탈북자들의 증언이다./송혜진기자 enav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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