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트럭 사고 4시간뒤 보고
보고 2시간뒤 모든 자료 검토 정상회담 때 超스피드로 조의


한·미 정상회담날인 지난 9일 새벽 4시30분, 백악관의 한 관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4시간 전에 한국에서 50대 여성이 주한미군 트럭에 치여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는 미 국방부의 긴급연락이었다. 정상회담 7시간 전이었다.

오전 6시30분 백악관에는 국방부에서 보낸 모든 관련 자료가 도착했다.

정상회담 준비팀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 들어서는 노대통령에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이 사건에 대해 조의를 표했고 기자회견에서도 이 문제를 먼저 언급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미국측은 3년 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고가 반미(反美)감정을 촉발시킨 큰 사건으로 비화했던 악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백악관은 이 사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도 전에 신속하게 선제대응에 나섰던 것이다. 다음날 이 관리는 “한국의 반응이 어떠냐”고 물었다. “언론보다 더 빨랐지?”라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정상회담에서는 부시 대통령이 노대통령에게 “한국인들이 이제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노대통령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자, 부시 대통령은 “진짜 아니냐”고 재차 확인했고, 노대통령은 “정말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부시 행정부가 한국여론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최근 미국의 대한(對韓)외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변화다.

미국은 소수 엘리트들끼리 독식하던 한국의 외교안보 밥상 위에 보통사람들이 이미 숟가락을 얹어놓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게다가 한미동맹을 제대로 꾸려가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 정부와 일하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도 골치가 아픈 것이다.

그러니 미국으로서는 외교안보문제에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한국여론을 어루만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반면 우리 정부는 외교안보 영역에 뛰어든 보통사람들의 존재를 성가셔 한다.

외교안보담당 엘리트들은 보통 사람들이 외교안보문제를 논하는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거대담론’이며, 정책에 직접 간여하지 않는 전문가 의견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구 두는 훈수’라는 식의 발언을 종종 한다.

동맹이 됐든 북핵문제가 됐든, 정부가 알아서 할테니 보통사람들은 참견하지 말라는 식이다.

그래서 이번 한미정상회담이 ‘굳건한 동맹관계’를 재확인하는 기회였음을 강력하게 홍보하자는 데 양국 정부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

양국 모두 한국여론을 향해 ‘한미동맹은 당신들이 보는 것만큼 나쁘지 않다’고 설득하는 데 열을 올렸고, ‘성공’으로 예쁘게 포장해서 보통사람들이 손이 닿지 않는 선반 위에 높이 높이 올려놓았다.

우리 정부는 언론의 비판을 따돌린 데 만족했고, 미국도 ‘동맹이슈의 정치화’를 막았다고 흡족해 했다.

그런데 그 성공적이었다는 정상회담 이후 잡음이 나온 곳은 언론도 여론도 아닌 정부 차원이었다.

미국 관리가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라 불렀고, 반기문 외교부 장관과 정부 관계자들이 다투어 유감을 표시했다.

노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미스터 김정일’로 불러달라고 몇번이나 당부했다는데, 눈치없는 이 관리가 아예 ‘폭정’을 들고 나왔으니 우리 정부로서는 속터질만도 했을 것이다./워싱턴=강인선특파원insu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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