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목사가 북한에 의해 납치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서울 세종로 외교부청사 앞에서 김 목사 송환 요구 시위를 벌이고 있는 북한 인권단체 회원들(2004년12월15일)./황정은기자(블로그)fortis.chosun.com

北공작원 4명·조선족 4명등 8명이 납치작전
실패해도 끝까지 추적


김동식 목사 납치조는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류영화(조선족)씨가 98년 8월 함경북도 보위부 지도원인 지모 상좌(우리의 중령에서 대령)의 하부 공작원으로 포섭되면서 꾸려진다. 납치조는 지 상좌를 포함한 북한 공작원 4명과 류씨를 포함한 조선족 4명이다.

조선족은 류씨가 자신의 고향(룽징) 친구 3명을 포섭한 것이다. 처음에 류씨 친구들은 “이런 일을 해도 되는가”라며 망설였지만 류씨로부터 식사와 술을 대접받고 마음을 바꾼 것으로 조사됐다.

납치조의 활동은 철저하게 ‘지령→정탐→납치→인도→보상’의 순으로 이뤄졌다.

지령은 책임자격인 지 상좌가 내렸다. 지 상좌는 중앙보위부의 지시와 하부 공작원의 보고에 따라 납치 대상을 선정했다. 지령을 받은 납치조는 현장 회의를 통해 납치 방법, 시기를 정한다. 이후 이들은 현장 부근에 비밀 아지트를 마련하고 성공 때까지 합숙을 하면서 납치 대상자의 움직임을 치밀하게 정탐한다.

김 목사 납치 건의 경우, 김 목사 주변 인사를 통해 옌지(延吉)에서 김 목사의 활동을 미리 파악해 납치 예정 장소까지 미행했다. 임모씨 일가 6명을 납치할 때처럼 1차 시도에서 은신처를 찾지 못해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행적을 추적해 납치하는 집요함을 보였다.

납치 때는 중국 공안(公安·경찰) 복장으로 위장했다. 피랍자를 옮길 때는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한족(漢族) 기사가 모는 택시를 이용했다. 납치 현장에서는 망을 보는 조와 납치를 실행하는 조로 나눴다. 수갑이나 가스총 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납치 과정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휴대전화를 통해 북한에 있는 책임자 격인 지 상좌에게 수시로 연락하며 지시를 받았다.

납치한 인사는 중국 룽징시로 이동, 두만강을 건넌 뒤 함북 회령시 보위부 요원들에게 넘겼다. 납치에 성공했을 때는 빠짐없이 보상이 뒤따랐다.

현금을 받은 적은 없지만 ‘개구리 기름’에서 ‘고려청자’까지 현금화할 수 있는 다양한 현물을 받았다. 현물의 가치는 인민폐 1만2000원(한화 180여만원)부터 3만달러(3300만원)까지 다양했다./안용현기자 justice@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