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북한 경수로 건설 사업을 1년간 중단키로 결정함으로써 지난 94년 체결된 미·북 제네바 합의가 사실상 무력화됐다.

북한이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이 대북 경수로 제공을 책임지는 것을 골자로 한 제네바 합의는 작년 북한의 핵개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이미 유명무실해진 상태였지만 이제 공식적으로 수명을 다 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대북 경수로 사업 중단은 북핵(北核) 사태의 위기 지수를 또 한 단계 높이면서 여러 가지 파장을 불러 올 것이 분명하다. 당장은 북한의 반발 가능성이다.

그렇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핵 억제력을 물리적으로 공개하는 조치가 취해질 것”(10월 16일 외무성 대변인)이라고 공언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이제 드러내놓고 행동의 자유를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북한은 스스로 핵개발을 공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수로를 요구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도저히 통할 수 없는 어거지일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북한이 핵문제 해결을 미루면 미룰수록 국제사회의 압력이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차제에 분명하게 체감하게 된다면 북핵 위기가 해결의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이 행정부가 바뀌는 데 따라 경수로문제에 대한 의지와 일관성이 오락가락하는 걸로 비쳐지는 것도 문제다.

경수로사업의 1차 책임을 진 미국이지만 경비는 대부분 한국과 일본에 떠맡도록 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태도를 달리해 온 미국의 소극적 자세는 북한에 역공의 빌미를 준 측면도 없지 않다.

대북 경수로사업의 중도 하차는 북핵 위기를 둘러싼 한반도에서 그나마 중요한 버팀목이자 나침반 구실을 했던 장치 하나가 사라지는 걸 의미한다.

예측 불가능한 돌발 행동을 국가전략의 원칙처럼 동원하고 있는 북한정권에 대한 우리의 효과적인 대응 방안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분명한 대북 원칙을 확고하게 천명하고 실천함으로써 북한에 그들의 빗나간 행동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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