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의 정체는 무엇인가? … 이대로 놔두면 안보제방 무너져

좀체 땅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물이 낮에도 버젓이 나다니는 세상이라면 그것은 태양이 떠 있으나마나 한 밤중 세상이기 때문이다. 유선형의 몸집을 가지고 앞다리를 재빨리 회전시켜 자유자재로 땅속을 헤집고 다니는 두더지는 퇴화된 눈 때문에 굴 속에 서식한다. 두더지는 외톨이로 사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햇볕정책’의 일식(日蝕) 이후 서울에 두더지들이 무리를 지어 대낮에도 활보하고 있다.
요즘 한 재독교포가 서울에 왔다. 초청한 측과 학생운동권에서는 그를 군사독재와 싸운 민주화 운동가로, 저명대학 재직 철학교수로 치켜세우고 있지만, 그를 불러 조사한 국정원은 북한 노동당에 입당하고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검찰의 입건처리 귀추가 주목된다.

그의 사상과 지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화이트헤드(A. N. Whitehead·1861-1947)는 말한다.

“위대한 철학자는 진공 속에서 사색하지 않는다. 그의 가장 추상적인 개념들조차도 그의 생존시기에 여건에 의해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 …지성과 감성의 관계는 우리의 의복과 신체의 관계와 같다.” 그렇다면 송 교수는 어느 나라 공기와 물을 마시고 사색하였나. 지성으로 가린 그의 심신은 과연 건전한가?

은둔생활을 즐긴 소로(H. D. Thoreau·1817-62)에 따르면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명민한 생각을 가지거나 학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명령에 따라 소박·자립·관대·신뢰의 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송 교수가 찾아간 북한 공산당 지도자에서 검소를 일생의 덕목으로 지킨 호치민(1890-1969), 자신의 장례마저 간소화시킨 저우언라이(1898-1976), 아니면 민생을 위해 경제를 개방시킨 덩샤오핑(1904-1997) 중 누구를 보았는가? ‘내재적 접근법’으로 장님이 되었는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Platon·기원전 428-기원전 348)은 “철학자가 군주가 되기 이전에는 도시(국가)들이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철학이면 만사형통인 줄 알았던 순진파였다. 세상이 문명화화면서 다양한 사상가들이 등장해 각양각색의 담론을 쏟아놓았다. 개중에는 먹고살기에 바빠 취생몽사하는 듯한 범인들보다 못한 미망(迷妄)의 철학자들도 무수히 나타났다.

흄(D. Hume·1711-76)은 “일반적으로 종교의 오류는 위험한 것이지만 철학의 오류는 (위험하기보다) 우스꽝스러울 뿐”이라고 헛짚었다. 따지고 보면 그릇된 사상처럼 위험천만한 대량살상무기는 없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참담한 실패로 끝난 소비에트 체제를 지탱했던 이념이 그러했다. 북한의 김씨부자 체제는 순수한 공산주의자들조차 부끄러워할 만큼 반민주·반인권적이다. 눈이 퇴화된 두더지가 입마저 비뚤어졌는가?

지난날 군사독재정권, 유신이념에 반대한다는 명분 아래 ‘적의 적은 우방’이라는 치졸한 단순논리에 이끌려 북한을 감싸안은 사람을 참다운 지성인, 인권론자, 민주인사로 평가할 수 없다. 그는 지금 우리 실정법을 운운하고 있다.

로마 공화정이 무너지고 황제가 등극한 시대에 살면서도 지성의 목소리를 자처한 키케로(Cicero·기원전 106-기원전 43)는 “국민의 이익이 최고의 법률”이라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인의 이익은 무엇인가. 남한의 공산화인가, 자신의 영달인가? 기구한 인생에 연민을 느낀다.

어두운 곳에 숨어 사는 두더지는 쉽게 퇴치되지 않는다. 개·고양이가 간혹 잡기도 하지만 두더지 분비액의 역한 냄새 때문에 먹지는 않는다. 요즘 우리에게는 쓸 만한 개·고양이도 없다보니 세상은 온통 설치는 두더지들 판인 듯싶다. 두더지 구멍 둔덕을 태산으로 여기는 매카시즘적 우(愚)를 범해선 안 되지만 두더지굴을 방치하면 튼튼한 안보 제방도 무너진다.

/ 金秉柱·서강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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