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방문 중인 최병렬(崔秉烈) 한나라당 대표가 17일 오전 덩컨 헌터 미 하원 군사위원장을 만난 장면은 한·미 관계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최 대표는 이전에 만난 다른 미국 지도자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주한미군의 2단계 재배치는 최소한 북한 핵문제 해결시까지는 늦춰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자 헌터 위원장은 “미군 재배치는 북한의 야포와 장사포 사정거리 내에 있는 미2사단의 보호차원에서 추진하는 것”이라며 “한국에는 용맹스러운 맹호부대, 백마부대도 있는데, 그 자리를 한국군으로 대체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요지로 응대했다.

의례적인 외교적 수사는 거의 없이 헌터 위원장은 시종 ‘너희 나라 군대로 지키면 되지, 왜 미군더러 총알받이가 돼 달라는 것이냐’는 식으로 맞받았다.

최 대표가 만난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도, 교민들도 최 대표를 놀라게 했다. 한국전 참전기념비를 방문하자 이곳 재향군인회장은 “조국에서의 잇단 반미시위로 피로 맺은 전우애에 금이 가고, 동포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라는 ‘격문’을 그의 앞에서 읽었다.

14일 저녁, 몇몇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한·미관계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고 진단하기까지 했다. 16일 북한인권 운동가인 수전 솔티 여사는 “한국 정부는 탈북자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다”라고 면전에서 한국을 성토했다.

이런 탓인지 최 대표는 미국 방문 내내 “한·미관계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정말 큰일이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또 “반미 시위자는 소수이며, 대다수 한국인은 한·미동맹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역설했으나 이 정도로 상황이 바뀔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게 미국 내 분위기였다.
/뉴욕(미국)=許容範 정치부 기자 he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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