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민간 단체가 주최한 광복절 집회에서 인공기와 김정일 초상화가 불태워진 것과 관련해 유감을 표시한 것은 북한의 억지 주장에 한국의 대통령이 무릎을 꿇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북한의 주장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엉뚱한 트집 잡기였다. 당시 집회는 정부와 무관했을 뿐 아니라 대학생들의 스포츠 축제인 유니버시아드대회와는 더욱더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런데 북한이 이를 문제삼아 유니버시아드대회에 불참하겠다고 위협하고 한국 정부의 ‘사죄’를 요구한 것은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우리 체제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자 한국 정부를 길들이겠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 문제는 우리가 머리 숙일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돼온 북한의 이런 억지 부리기를 바로잡겠다고 나섰어야 할 사안이었다. 엊그제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북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하루 만에 이를 뒤집었다. 뭐하는 정부인지 국민들은 헷갈린다.

북한을 향해서 유감을 표한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국민을 탓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북한과 접촉해 대회 참가를 약속받은 것도 구차스럽기 그지없다. 이처럼 당당하지도 정직하지도 못한 정부의 자세는 남북관계에 두고두고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나쁜 선례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노 대통령은 “성조기 모욕행위가 있을 때마다 유감을 표명해 왔듯이…”라고 말했다. 미국에 했던 것처럼 북한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한 것이라는 설명이지만 한국 정부는 그간 각종 집회에서 미국 성조기가 불탈 때마다 유감을 표시한 것도 아니다.

지난 7일 발생한 한총련 시위대의 미군기지 난입사건에 대해 정부가 유감을 표시한 것은 사건의 심각성과 시위 자체의 불법성이라는 배경에서였다. 성조기를 태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통령 말 속에 담겨 있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마치 우리에게 미국과 북한이 동등한 존재인 것처럼 여기는 인식이다. 아무리 남북 대화를 하고 화해·협력을 추구한다고 해도 북한은 엄연한 주적(主敵)일 수밖에 없고, 미국은 이런 안보 위협에 함께 맞서는 한국의 동맹국이다.

이번 상황이 대통령까지 나서 유감을 표해야 했는지 국민들은 화가 치밀 정도다. 이 정부의 대북·대미(對美) 인식과 정책이 언제까지 이런 유(類)의 표류를 거듭할 것인지 걱정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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