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상황이 전쟁을 향해 흘러가고(drifting) 있다”는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의 경고는, 북핵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실감케 한다. 페리는 워싱턴포스트지(紙)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점점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고, 이르면 올해 안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페리 전 장관은 미국 정부에서 북핵 문제를 직접 다룬 경험을 갖고 있는 최고위급 전문가다. 94년 1차 북핵 위기 때 국방장관이었던 페리는 한반도 전쟁 계획을 만들기도 했었고, 98년부터 1년여간 대북정책조정관 일을 맡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페리의 입에서 또다시 ‘한반도 전쟁’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다.

굳이 페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금 북핵 위기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 북한이 핵연료봉의 재처리를 끝내고 핵무기용 플루토늄 생산을 시작했다고 주장한 이상, 한·미·일이 북한측에 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해온 마지노선(線)은 모두 무너졌다.

게다가 북한은 지난 5년간 70여차례나 고폭(高爆) 실험을 실시해 왔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시중에 ‘한반도 9월 위기설’이 번지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페리는 북한과 협상조차 하지 않는 미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할 쪽은 한국 정부다. ‘평화적 해결’이라는 구호 하나 치켜들고 시간을 보내온 한국정부의 대응을 보면, 북핵 위기가 우리의 생존이 걸린 절박한 문제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이나 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청와대가 국내 스캔들에 쏟아부은 시간과 정열의 절반만이라도 북핵 문제 쪽으로 돌렸더라면 이처럼 남북 7000만 민족이 아무 대책없이 전쟁을 향해 흘러가는 신세는 면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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