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奎/국방대 초빙교수·예비역 공군소장

한국의 정치세력을 양분한 듯한 진보와 보수 논쟁에서 진보주의는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을 급진적으로 개혁하려는 성향’으로, 보수주의는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면서 불합리한 부분은 점진적으로 개선하려는 성향’으로 보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런 개념하에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을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급진적 변혁세력으로 일부는 반체제적 혹은 친북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을 ‘가식적 자유와 민주를 내세우고, 냉전구조를 이용해 기득권이나 유지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들’로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진보와 보수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양측의 논쟁과 정치의 장(場)을 보장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는 ‘안보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은 양 세력의 정쟁 과정에서 안보의 장이 실종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각축장이 되어온 한반도의 태생적인 지정학적 요인과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적 상처 위에서 굳어진 남북분단 상황, 그리고 북쪽의 유·무형의 대남 도발들이 이들을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안보세력으로 육성했다.

이들은 정치체제 특성상 보수세력의 휘하에 들어가 정치적 오물을 뒤집어 쓰기도 하고, 일부는 안보위기라는 판단하에 정치적 전면에 나섰다가 진보와 보수 양 세력으로부터 호된 정치적 단죄를 받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진보세력과 애정·갈등의 관계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국체 보존에 대한 열정과 헌신의 가치관만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북한은 김대중 정부가 5년 동안 지속해 온 남북 화해협력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공식 이데올로기, 생산수단의 국유화, 일당독재, 한반도 공산화 목표 등 어느 하나 개혁하거나 포기한다고 공식 표명한 적이 없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90년대 초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고 북한에 경제적 어려움과 식량난이 겹치자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는 논문을 통해 “여러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은 사회주의를 변절시킨 기회주의의 파산이며 진리는 가리울 수 없고 말살할 수 없는 것이다”고 했다.

김정일은 선군(先軍)정치라는 이름의 군사통치체제를 구축하고 핵 카드를 쓰면서 북한 주민들에게는 대미 적개심과 전쟁 준비를 독려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민족공조를 요구하고 있다. 남북경협에 응해 경제적 실리는 챙기면서 한·미 동맹의 틈을 벌리려고 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체제 생존을 위한 전술은 변하고 있으나 한반도 공산화의 기본 전략에는 변함이 없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식하에 새롭게 출범한 노무현 정부에 한국 안보에 대한 충정(衷情)을 개진하려고 한다. 첫째, 남북 대치 상황이 종식될 때까지 남북 교류협력은 지속하되 대북 협상에서는 정(政)·군(軍) 분리를 정책기조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위험수위에 도달할지도 모를 현재의 한·미 동맹체제에 대한 이상 기류를 시급히 차단하고 신뢰 회복과 연합전비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

둘째, 통일 이후를 대비한 장기적 조치로는 주변국의 위협을 억제하고 동북아 세력 균형의 지렛대 역할을 정책기조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한·미 동맹안보 체제를 ‘1(동맹국)+지역안보 체제’로 전환해 더욱 안정된 한반도 상황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는 동북아 중심국가가 되는 데 필요한 해외 투자유치의 장·단기적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평화는 전쟁을 피하려 한다고 보장되는 것이 아니며, 평화로울 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여 이에 대한 정신적·물적 대비태세와 능력을 갖출 때 보장되는 것이다.

국가 안보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는 안보세력은 어떠한 위치에 있건 ‘현실이 아무리 평화스럽다 할지라도 전쟁을 두려워하여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필히 위험(전쟁)을 자초할 것(天下雖安 忘戰必危)’이라는 금언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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