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어제 대북 비밀송금과 관련해 밝힌 내용은 국민의 궁금증과 의혹을 전혀 해소하지 못했다.

북한에 보낸 돈이 5억달러였고, 2억달러의 환전에 국가정보원이 개입했다는 이미 보도된 사실을 확인한 것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의혹에 대한 부인과 변명으로 일관했다.

이 정도로 이 거대한 의혹을 적당히 뭉개고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당장 김 대통령은 이 돈이 순전히 현대가 대북사업을 하기 위해 북한에 송금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거액을 대출해줬으며, 그 대출에 누가 개입했는지 등의 가장 초보적인 의혹에 대해서조차 단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았다.

김 대통령은 진상에 대해 사실상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으면서도 특별검사제 도입 등에 대해선 계속 반대했다. 결국 이 사건을 덮자는 것인데, 지금 이 시점에서 남북관계의 뒤틀린 관행을 바로잡지 않으면 두고두고 국익에 해(害)를 끼칠 것이 명백한 이상 덮을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덮여질 일도 아니다.

이제 의혹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진상을 밝힐 생각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처음부터 예견된대로 계좌추적 등 법적인 수사권을 통해 무슨 돈이 얼마나, 왜, 어떻게 북한으로 넘어갔는지 밝히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이 김 대통령의 입장발표를 기회로 다시 정치적 해결 운운하고 나선 것은 법적인 수사권을 통해 진상이 드러나는 것을 회피하려는 의도로밖에는 볼 수가 없다.

특히 노무현 당선자의 핵심 측근이 김 대통령의 입장 발표에 대해 “무얼 더 밝히란 말이냐”고 언급했는데, 노 당선자도 같은 생각인지 궁금하다.

수사권의 발동은 어차피 차기 대통령이 내릴 수밖에 없는 결정이다. 새 정권은 책임을 정치권에 미루지 말고 진상 규명에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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