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濬
/산업부장 junlee@chosun.com

원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요즘 더욱 외부와의 접촉을 꺼린다는 후문이다. 그는 매일 아침 7시30분쯤 계동 현대사옥 12층 사무실로 출근해서 점심식사를 빼고는 종일 거의 사무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측근인 김윤규(金潤圭) 사장이 가끔 대북(對北)사업과 관련해 보고하는 것 외엔 외부 손님도 거의 없고, 저녁에도 약속을 별로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요즘 정 회장의 심사가 편할 리 없다. 불면(不眠)의 밤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최근 측근들에게 “애국하는 심정으로 대북사업에 나선 현대의 입장을 언론이 너무 몰라준다”며 서운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사실 정 회장은 대북사업에 ‘모든 것’을 걸었다. 고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아들 중에 대북사업에 가장 열심인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지난 2000년 ‘왕자의 난’ 때 그가 형인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을 제치고 그룹의 적통을 차지한 것은 대북사업 덕분이 컸다.

외환위기 직후 대북사업은 현대의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다른 기업들이 구조조정의 거센 파고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동안 현대는 정치권의 비호 아래 거꾸로 국내외 사업 확장에 몰두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거역하는 ‘무모한 반란’의 중심에는 정 회장이 서 있었다.

그는 1인 전횡의 황제식 경영을 강화했고, 주주들 모르게 회사 자금을 사금고(私金庫)처럼 마구 빼돌렸으며, 대북 뒷거래에 반대하는 임원들의 옷을 벗겼다. ‘지배구조 개선이나 경영 투명성’이란 말은 대북사업에 가려져 아예 실종되어 버렸다.

정 회장으로선 그 모든 게 ‘애국하는 심정’이었는지 모르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과 미래 주력산업으로 키우던 전자(하이닉스)는 대북사업에 돈을 퍼붓다가 유동성 위기에 몰려 채권단으로 넘어갔고, 현대상선도 알짜사업인 운송선 부문을 팔아치워 반쪽이 났다. 재계 1위였던 우량기업들을 거덜낸 것이 ‘애국’일 수는 없다.

정 회장은 얼마 전 금강산 육로관광 사전답사단을 이끌고 북으로 가기 전, 정주영 회장 묘소에 들러 눈물을 뿌렸다. 때늦은 참회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현대신화(神話)를 지켜내지 못한 ‘못난 아들’을 자책하는 눈물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현대의 지금 모습이 달라질 리 없다. 중요한 것은 이제라도 진정 ‘현대가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다. 정 회장의 눈물에 그런 고민과 번뇌가 담겨 있었는지 궁금하다.

청와대 조순용 정무수석은 “대북송금의 전모를 공개하면 현대는 망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북 뒷거래의 진상을 밝히지 않으면 한국경제가 ‘망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국제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가 한국의 신용등급전망을 두 단계 하향조정한 이유는 북핵(北核) 때문만이 아니다.

기업인들은 “현대의 대북 뒷거래가 한국기업 전체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시켰다”고 안타까워한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기업은 나름대로 지배구조와 경영 투명성이 개선되고 정경유착도 많이 해소됐다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현대 사건 한 방이 ‘코리아브랜드’ 전체에 먹칠을 했다는 얘기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현대 사건의 뒤처리를 주시하고 있다. 한국이 정치적 타협으로 대충 덮고 넘어갈 것인지, 원칙과 법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릴 것인지가 한국경제의 자정(自淨)능력을 평가하는 바로미터라고 보기 때문이다. 외국계 투자은행의 한 임원은 “차기 정부가 가장 서둘러야 할 일은 10대 국정과제보다 현대의 대북 스캔들로 실추된 한국기업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가 타격을 입는다 해도 정몽헌 회장과 현대가 밝힐 것은 밝히고 책임질 것은 져야 한다. 현대의 운명을 걱정하는 것에 앞서 나라경제의 운명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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