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통일부장관은 북핵(北核)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 아무래도 ‘대한민국’적 사고가 어려운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대북문제 주무장관으로서 북핵과 관련해 걸핏하면 북한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거나 한국의 ‘중재자’ 역할을 강조해 물의를 빚는 것인가.

그는 엊그제 민주평통 보고회에서 “우리가 북쪽의 입장이 아니니까 미국과만 보조를 맞추고 북한을 압박하는 것은 현명한 정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중재 역할’을 거듭 강조했다.

현 정부가 말하는 중재노력은 지난번 김대중 대통령 특사가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도 못한 채 퇴짜를 맞고 돌아오는 것으로 그 한계를 분명히 드러냈다.

게다가 북핵 문제의 유엔안보리 상정과정이 진행 중인 예민한 시점에 굳이 실효성도 없는 ‘한국 중재론’을 강조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눈총을 더욱 자초할 뿐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 장관을 비롯한 현 정부 핵심의 인식 속에서 북핵문제의 당사자로서의 한국의 입장은 아직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저 미국과 북한의 대화와 협상을 유도해내는 것을 최고 과제로 삼고 있는 모습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정부는 스스로 북한에 어떤 자세와 결의를 보이겠다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이런 정부에 대해 국제사회가 신용전망을 낮추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현 정부의 안일한 대처는 남북경협회담에 온 북측대표가 “주변환경이 어떠하든 북남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상황까지 만들었다.

이는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든 말든 남한은 오로지 북한을 따라가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다 맞게 될 종착점이 어떤 모습일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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