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聖翰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뚜껑을 열 때마다 새로운 인형이 나타나는 러시아의 ‘마트로시카’ 목각인형처럼, 북한은 작년 12월 핵동결 해제를 선언한 이후 폐연료봉 봉인 해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 추방 등 단계적 조치를 단행해 오다, 올해 1월 10일 마침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다음번에 등장할 ‘인형’은 미사일 시험발사 재개일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였다.

북한의 NPT 탈퇴 성명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 단계에서’ 핵활동은 오직 ‘평화적 목적’에 국한된다는 점,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을 그만두면 핵무기 포기에 대한 검증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 점이다. 우선 평화적 목적을 강조한 것은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여 정치·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이다.

그러나 북한이 ‘현 단계’를 강조한 대목에서는 ‘핵 카드’가 먹혀들지 않을 경우 핵무기 생산에 본격 돌입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핵포기 검증 가능성을 언급한 부분은 북·미 불가침 협정 체결과 핵포기 검증을 등치(等値)시키려는 것으로 불가침 협정에 대한 강한 집착과 더불어 하루속히 북·미대화를 통해 체제보장을 이끌어 내고픈 북한의 초조감을 보여준다. 뚜껑을 열수록 점점 작아지는 마트로시카 인형처럼.

그러나 미국의 자세는 생각보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북한이 아직 한계선(red line)을 넘지 않았다고 본다. 미국은 이라크전 개시 전까지 북·미대화가 재개되지 않을 경우 북한이 핵무기 생산에 돌입함으로써 동북아 역학구도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것으로 우려하나 핵무기 생산에 들어가는 순간 국제사회의 대북 포용정책은 중단되고, 봉쇄정책이 확실한 정당성을 갖게 될 것이라고 본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대북 포용정책에 따른 과실을 많이 챙겼지만, 식량과 에너지 등에 있어 국제사회에 대한 의존도가 상승함으로써 봉쇄정책에 대한 취약성이 높아진 상태다. 북한이 최근 한국 내 반미기류를 활용하여 “북남 간 민족공조를 통해 미국에 대적하자”는 식의 한·미 이간 전략을 강화하고 있지만, 북한이 핵무기 제조에 직접 나설 경우 한·미 이간책의 전략적 효용성은 떨어진다.

따라서 미국은 시간이 북한 편에 있지 않다는 점을 주지시키면서 북한으로 하여금 체면을 유지하면서 핵포기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출구(出口)’를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14일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과감한(bold) 대북 접근을 행할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고, 파월 국무장관은 “핵 폐기시 북·미 간에 (제네바 합의가 아닌) 새 협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여러 가지 정치·경제적 혜택이 기다리고 있으며, 제네바 합의를 대체할 수 있는 보다 포괄적인 협정이 고려될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기대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이득의 대안을 제공해 줄 수 없는 이상, 북한은 게임 양상이 이쯤 되면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해야 한다. 북한에서건 남한에서건 주한미군 철수 요구의 구실을 주게 될 북·미 불가침 협정을 미국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북한은 이에 대한 차선책으로 미국이 대북 불가침 내용을 담은 공식적인 서면 보장안을 제시한다면 이를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 핵포기 선언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고 북한에 대한 ‘과감한 접근(bold approach)’을 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된다. 북한에 핵포기 선언의 확실한 이행을 설득함과 동시에 포괄적 대북정책 로드맵(roadmap) 작성을 위한 한·미 양국 간 협의를 ‘조용히’ 진행시켜야 한다. 대북정책 로드맵 속에는 북한의 WMD 위협 제거와 검증 및 한·미·일 역할 분담방안, 국제적 대북지원의 규모와 일정 및 활용방안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한·미 양국이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북한 핵 이후 실질적 평화구축을 위한 틀을 마련할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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