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相哲
/충남대 교수·미국외교사학

1950년대의 한·미관계는 대립과 갈등에 이은 궁극적 타협이 반복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李承晩) 전(前)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미 행정부와의 협상에서 탁월한 외교수완을 발휘했다. 국제정치의 냉혹함은 물론 미국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철저한 ‘지미(知美)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 협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대통령은 때로는 ‘벼랑 끝’ 전략을 구사하는 모험도 불사했다. 우리 정부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은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재촉하기 위한 비장의 승부수였다. 휴전(休戰)을 위해 한국정부의 협력이 절실했던 미국으로서는 ‘경고’ 이외의 다른 제재방법을 동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더 이상의 양보를 얻어내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경우에는 ‘벼랑 끝’으로 내모는 무모한 자폭행위를 결코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 대통령의 ‘북진무력통일론’은 실천에 옮기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대미협상에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뿐 아니라, ‘수사적(修辭的·rhetoric) 기교’이기도 했다.

1953년 11월 중순 이 대통령은 닉슨 미 부통령에게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가장 효과적인 협상수단을 잃게 된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지속적인 견제가 될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후일 닉슨 대통령은 이 대통령의 이 같은 통찰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승만 외교의 결실인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의 장비현대화 등은 공산주의와 일본의 팽창주의 위협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장치들이었다. 이 대통령의 선견지명으로 6·25전쟁이 종식된 후 오늘날까지 한국의 안보와 생존을 확보하는 동시에 한반도에 ‘긴장 속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생존’을 보장하는 군사적 안보가 정치적 민주주의나 경제적 발전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은 지도자였다. 소용돌이치는 광복 후 정국과 전쟁을 경험한 당시로서는 취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현실적 선택이었다.
이제 우리는 10년, 20년 앞을 내다보는 또 다른 걸출한 전문가와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다. 통일을 염두에 두면서 미국뿐 아니라 일본·중국·러시아의 4강에 대한 전문가를 키우고 확보하는 일은 우리 정부와 온 국민이 앞으로 가장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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