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성사는 김대중 외교의 금자탑이 될 것이다. 그러나 김 대통령의 계속된 공개적 제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반응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의 무조건적 만남은 있을 수 없다. 정상회담은 반드시 사전에 합의된 의제들을 논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쌍방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대립되게 마련이어서, 의제의 사전 합의에는 상당한 진통이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이 의제로 가장 상정하고 싶어하는 것은 주한미군의 철수 내지는 평화유지군으로의 지위 변경에 대한 요구가 될 것이다. 김일성 사후 북한의 현 체제는 북한 군부의 지지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다. 북한 군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주한미군의 철수나 지위변경을 관철시키든지 아니면 더 많은 경제적 자원을 군비증강에 쏟아붓도록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986년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 사이의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에서 벌어진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당시 의제 선정과정에서 레이건 대통령은 전략방위계획(SDI) 문제는 일절 논의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천명했다. 그러나 취약한 소련 경제로 인해 미국과의 군비경쟁에서 뒤지고 있던 소련 군부는 고르바초프에게 SDI를 적어도 10년 동안은 실전배치하지 않고 실험실에서 연구만 하도록 하는 확약을 받아올 것을 요구했다. 실제 회담에서 고르바초프가 의제에도 포함되지 않은 이 문제를 직접 거론했을 때 레이건이 회담장에서 퇴장해 버림으로써 고르바초프는 돌이킬 수 없는 굴욕을 당하게 되고, 군부의 지지뿐만 아니라 그의 국내정치적 기반도 일시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소련의 몰락과 미-소 냉전체제 해체의 거대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약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점을 도출해내지 못하고 빈손으로 평양으로 되돌아 갈 경우 그의 국내정치적 기반은 고르바초프처럼 대단히 취약해질 것이다. 현재 우리 정부는 주한미군 철수 내지는 지위 변경에 대한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미국도 이 문제가 자신들의 사전 양해 없이 남북한 사이에 논의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북한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김 대통령의 제의에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수 있는 의제들 중 북한측 요구 사항인 국가보안법 철폐, 우리측 의제인 이산가족 상호방문, 북한 억류 국군포로 송환문제, 북한 인권문제 등 어느 하나도 쌍방이 합의하기 어려운 난제들뿐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북한이 선뜻 정상회담에 응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그렇지만 최고통치권자의 의지를 구체화해야 할 책임을 떠맡은 김 대통령의 전략가들은 우리의 국가안보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남북정상회담의 실현을 위한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들을 창출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유엔 총회 등과 같은 국제회의에서 정상회담의 형식이 아니라 일종의 상견례 형식의 회담을 추진하는 방향도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윌리엄 페리 대북조정관 정도의 지위를 가진 대통령 특사를 지명해 실무를 담당케 하는 가시적 조치도 즉시 취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 대통령이 정상회담의 목적은 남북한 사이의 평화공존을 정착시켜 국가안보와 경제적 번영이라는 불변의 국가이익을 지키기 위한 조건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지, 집권 여당의 총선 승리나 정권 재창출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 국가 이익을 위해 꼭 필요하다면 총선의 결과에 상관없이 인내를 갖고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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