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과 국무부가 15일 일본과 북한의 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해 “어떤 대화든 지지한다”고 밝혔다. 전날 한국이 북한의 ‘형제국’ 쿠바와의 수교를 발표한 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이 “일본이 정치적 결단을 내린다면 두 나라가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다”며 일본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보인 데 대한 반응이다.
북한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 카드를 이용해 한·미·일 삼각 협력 구도를 흔들어 놓으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게다가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되면 북한은 핵 동결 카드로 제재 해제를 얻어내는 거래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한·미·일 결속의 지속적 약화와 한국의 고립을 꾀하는 ‘통(通)미·일, 봉(封)남’ 전략인 셈이다.
일본 정부는 최근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북·일 정상회담을 모색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지율이 16.9%로 최저점을 찍은 기시다 내각이 국면을 전환할 돌파구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김여정은 15일 담화문에서 “일본이 우리(북한)의 정당방위권에 대하여 부당하게 걸고 드는 악습을 털어버리고 이미 해결된 납치 문제를 장애물로 삼지 않으면 두 나라가 가까워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기시다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북한은 지난달 일본 노토반도 지진 때 이례적으로 기시다에게 ‘각하’ 호칭을 쓴 위로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 정치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15일 미국평화연구소에서 열린 세미나에서는 “북·일 정상회담 움직임을 어떻게 보나. 북한이 (한·미·일) 삼각 협력을 방해하려 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나”란 질문이 나온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이 자리에서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선임보좌관은 “미국이나 다른 국가가 원하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북한과의 관여를 지지하고 협력하며 서로 협의한다고 말하겠다”고 답했다. 정 박 국무부 대북고위관리도 이날 브리핑에서 “북한이 러시아가 아닌 다른 어떤 종류의 외교든 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라고 했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북한이 대형 도발에 나서면 현직인 조 바이든 대통령 책임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어, 바이든 행정부는 대화를 통한 한반도 상황 관리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고 있다.
다만 미·일의 이런 반응이 곧바로 한·미·일 삼각 협력의 약화를 뜻한다고는 볼 수 없다. 박 국무부 대북고위관리는 “북한은 항상 우리(한·미·일) 관계나 일본과 다른 나라, 한국과 다른 나라의 관계를 갈라놓는 데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북한의 의도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외교 소식통은 “김여정의 대화 제의를 보면 관계 회복을 위해서 납치자 문제와 북핵 문제는 거론하지 말라는 것인데, 일본 총리 입장에서 저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라며 “현재 상황에서 일·북 관계가 의미 있게 진전되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김숙 전 유엔 대사는 “한·일 양국 정계·재계 원로 및 민간 차원에서 미래지향적인 양국 관계를 그려나가며 관계를 진전시켜야 북한에 대응할 수 있다”며 “현 단계에서 김여정 발언에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고 했다. 위성락 전 주러 대사는 “북한은 미국·일본과만 대화하려 하고 한국은 배제하려 할 것”이라며 “한반도 문제 논의에서 우리 외교 정책 공간을 넓히려면 강경과 온건이 섞인 대북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