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2015년 하반기 국내 언론 중에서는 처음으로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쿠바 특파원 신분으로 6개월간 체류했다. 당시 미국 오바마 정권은 쿠바와 54년만에 수교를 맺었다. 지구상에 몇 남지 않았던 사회주의 국가 쿠바의 변화상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변화는 더뎠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아바나 시내에 처음 들어선 미국 대사관 건물의 흔적 자체를 없애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당시 라울 카스트로 정권은 미 대사관 건물 앞을 쿠바 국기로 도배해 버렸다. 자본주의의 침투를 최대한 늦추려는 쿠바 정권의 마지막 자존심처럼 보였다.

쿠바의 북한 대사관. 북한 외교관과 가족들은 대사관저에서 합동 생활을 했다./박국희 기자
쿠바의 북한 대사관. 북한 외교관과 가족들은 대사관저에서 합동 생활을 했다./박국희 기자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까지 쿠바는 해외 국가 중 우리나라 국민보다 북한 주민(대부분 외교관 가족)이 더 많이 살고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였다. 피델 카스트로와 김일성의 사회주의 혁명을 공통 분모로 쿠바는 중국, 러시아에 이은 북한의 세계 3대 우방이었다. 아바나의 북한 대사관 규모 역시 중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컸고 수십명의 외교관과 가족들이 대사관저에서 합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반면 시리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등과 함께 그때까지 쿠바는 한국의 4개 미수교국 중 하나였다.

쿠바 북한 대사관의 체제 선전물 /박국희 기자
쿠바 북한 대사관의 체제 선전물 /박국희 기자

당연히 주쿠바 한국 대사관도 없고 양국간 수교가 없으니 비자도 나오지 않았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아바나 무역관 상주 직원 2명이 쿠바에 나가있는 유일한 한국 공식 인사였다. 2개월마다 인근 멕시코 등 해외를 나갔다 오며 갱신해야 하는 여행 비자를 받아 소설가 신분으로 아바나에 체류했다.

주쿠바 북한 대사관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3대 우방 국가에 수교도 맺지 않은 남한의 조선일보 기자가 특파원으로 상주하며 북한 관련 기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못 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인근 멕시코 대사관에 나와있던 국정원 직원을 통해 “북한 대사관에서 국내 포털을 매일 검색하며 아바나발 조선일보 기사를 모두 찾아보고 있다. 쿠바를 떠나지 않으면 쿠바 당국을 통해 불법 체류자로 추방시키겠다고 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나중에는 신체적으로 위해를 가하겠다는 협박까지 이어졌다. 결국 6개월만에 쿠바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당시 쿠바에서 썼던 기사들은 국내 포털에서 검색되지 않는다. 북한 대사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신문 지면으로만 기사를 인쇄했기 때문이다.

아바나 대학교의 북한 학생들의 모습. /박국희 기자
아바나 대학교의 북한 학생들의 모습. /박국희 기자

당시 아바나 대학교에서 유학하고 있던 북한 외교관들의 자녀를 접촉하려 했다는 사실도 북한 대사관 입장에서는 불편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바나에서도 가슴에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달고 다니던 북한 학생들은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며 수업이 끝난 후에도 대사관저로 다같이 들어가는 통에 좀처럼 접촉을 하기 쉽지 않았다. 삼성 갤럭시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던 쿠바의 북한 외교관 가족들은 현지에 나와있는 몇몇의 국내 목사나 교인들과만 김장 김치를 나누어 먹는 등 최소한의 교류만 이어오고 있었다.

쿠바 아바나의 한 교인이 북한 주민으로부터 받은 북한제 물티슈/박국희 기자
쿠바 아바나의 한 교인이 북한 주민으로부터 받은 북한제 물티슈/박국희 기자

쿠바와 북한이 김일성과 피델 카스트로·체 게바라의 사회주의 혁명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50년 전 혁명의 구호는 점점 빛을 바래가고 있었다. 쿠바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폐쇄적인 북한 사회에 흥미를 잃어가는 듯 보였다.

쿠바의 국영 배급소에서 주민들이 생필품을 타가고 있다. /박국희 기자
쿠바의 국영 배급소에서 주민들이 생필품을 타가고 있다. /박국희 기자

당시에도 쿠바 골목골목에는 사복 경찰과 정권의 보안대가 주민을 감시했다. 여전히 기름과 계란 등 생필품은 정해진 날짜에 배급소에서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일반 가정의 인터넷 설치도 엄연한 국가 반역 행위의 불법으로 치부됐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머무는 호텔 근처 와이파이 존에서만 별도의 인터넷 카드를 구매해야 제한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

2015년 당시 쿠바에서 인터넷 설치는 불법이었다. 쿠바 주민들은 외국인 관광객이 머무는 호텔 주변 제한된 와이파이 존에서만 한시적으로 인터넷 접속이 가능했다. /박국희 기자
2015년 당시 쿠바에서 인터넷 설치는 불법이었다. 쿠바 주민들은 외국인 관광객이 머무는 호텔 주변 제한된 와이파이 존에서만 한시적으로 인터넷 접속이 가능했다. /박국희 기자

그럼에도 밀려오는 문화의 물결을 쿠바 정권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미 미국으로 탈출한 쿠바 국민들이 자국에 남은 가족들에게 송금해 오는 달러가 국가 경제의 작은 축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였다. 메이저리거 류현진 선수로 국내에도 친근했던 LA다저스의 푸이그 역시 쿠바에서 미국으로 탈출한 숱한 케이스 중 하나다. 미국으로 탈출한 쿠바 국민들은 달러와 함께 인터넷이 되지 않는 아바나 가족들을 위해 CD도 같이 보내왔는데 그렇게 K팝과 한국 드라마도 쿠바 주민들 속에 스며들었다. 2015년 당시 쿠바의 최고 스타는 국내 배우 이민호였고 빅뱅의 ‘뱅뱅뱅’ 노래에 맞춰 안무를 연습하는 소녀들은 어느 골목에서나 찾을 수 있었다.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로 쿠바는 민생이랄 것도 없었다. 2015년 12월 31일 해가 넘어가는 그날 밤에도 여전히 국영방송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의 50년전 사회주의 혁명 연설이 흑백 방송으로 끊임없이 재생됐다. 피델 카스트로는 2016년 사망했고 형에 이어 권좌를 물려받았던 동생 라울 카스트로도 2021년 쿠바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내려왔다. 62년간 이어진 카스트로 형제의 통치 시대도 마감됐다. 현재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은 쿠바 혁명 직후 태어난 세대다.

쿠바의 시내에는 한국에서 수출된 중고 버스가 돌아다녔다. /박국희 기자
쿠바의 시내에는 한국에서 수출된 중고 버스가 돌아다녔다. /박국희 기자

인터넷이 없어 페이스북이 되지 않던 쿠바는 앞집 옆집 숟가락 개수가 모두 똑같았다. 서로의 생활 수준을 끊임없이 비교해 가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없어 보였다. 카스트로 일가를 비롯한 1%의 특권층을 제외하면 모두가 하향 평준화 속에 나름대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는 듯 보였다. 65년만에 쿠바가 한국과 수교했다. 양국 관계의 발전으로 당시 만났던 많은 쿠바 주민들이 좀더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쿠바 아바나 시내 모습. 미국과의 국교 단절 이후 60년간 이어진 경제 제재와 금수 조치로 1950년대 미국 '올드카'들이 여전히 돌아다니며 관광객들의 시선을 끈다. /박국희 기자
쿠바 아바나 시내 모습. 미국과의 국교 단절 이후 60년간 이어진 경제 제재와 금수 조치로 1950년대 미국 '올드카'들이 여전히 돌아다니며 관광객들의 시선을 끈다. /박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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