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일러스트=박상훈

새해 들어 김정은의 광기(狂氣)에 찬 발언으로 한반도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대중 강연 때마다 혹시 전쟁 나는 것 아니냐는 질문도 심심찮게 나온다. 여기에 더해 미국 미들베리 국제연구소의 로버트 칼린 연구원과 시그프리드 헤커 교수는 “한반도 상황이 1950년 6월 초반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 국무부 북핵 특사로 활동했던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명예교수도 “2024년 동북아시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전문가들의 공통점은 과거 북한과의 협상 경험이다. 반면 2007년 이후 10년 동안 평양에서 근무한 셰퍼 전 독일 대사는 “1950년 이후 한반도 전쟁 위기가 가장 심각하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북한의 강경 태도는 오래된 협상 패턴”이라고 지적했다. 전쟁 위기론과 협상 패턴론이 대립하고 있다. 과연 2024년 갑진년은 1950년 경인년만큼 혹은 더 위험한지 따져보자.

우선 남북한의 군사력부터 비교해보자. 1950년 3월 31일부터 4주간 김일성은 박헌영, 홍명희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최종 남침 계획을 승인받았다. 모스크바의 러시아 연방 대통령 문서보관소에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집요하게 요청하는 전보 48통이 보관되어 있다(웨더즈비 ‘다시 본 한국전쟁’ 1999). 당시 최강의 소련제 T-34 탱크 242대 지원도 확약받았다. 북한군은 야포 726문, 전투기 211대와 함께 각종 장비를 지원받아 기갑 전력을 증강하였다. 만주에서 국공(國共) 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족 병력 4만여 명 등 총병력 20만명이 전차를 앞세워 전면 남침을 감행하였다.

반면 남한은 국토 방위 전력을 전혀 갖추지 못하였다. 당시 남북한의 전력은 완전 비대칭이었다. 해방 후 미국의 대한(對韓) 군사 원조 정책(1948~1950)에 따라 10만명이 안 되는 국군의 기능은 ‘국내 치안 유지’였다. 전차가 단 1대도 없었고, 미국이 원조해 준 M8 장갑차 27대와 M2/M3 병력 수송용 장갑차 24대가 기갑 연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남침 사흘 만에 북한군 주력 105 전차 부대가 서울을 점령하였다. 무기와 병력 면에서 중과부적이었고 불가항력이었다.

그래픽=박상훈
그래픽=박상훈

김일성은 1946년 3월 토지개혁으로 군량미를 확보하면서 1948년부터 남침을 단계적으로 준비하였다. 1949년부터는 모스크바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스탈린의 재가를 채근하였다.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의 한반도 방위 제외 선언으로 남침은 시간문제였다. 미군 참전 시 중공(中共) 마오쩌둥의 참전 약속 확보만이 최종 변수로 남았다. 김일성은 5월 25일 북경에서 인민해방군의 참전을 확약받았다. 평양에 대한 중·소의 완벽한 백업이 형성되었다.

당시 서울의 시국은 아수라장이었다. 일부는 서울에서 평양의 김일성과 연락하며 남한 정국을 흔들었다. 남로당 박헌영은 무장 봉기와 테러를 선동하였다. 신생 민주주의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이었다. 해방 후 정국 혼란 속에서 국군도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남침 후 4개월이 지나서야 전차의 필요성을 절감한 국군은 미군의 M36 대전차 6대를 교육용으로 인수받아 전차 부대를 창설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남북한의 군사력은 균형을 이루어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피를 흘리며 미군의 군사 교리에 따라 군령 체계를 구축하고 적을 격퇴할 각종 부대를 창설했다. 1951년 6월 이후 정전협정 체결까지 2년간은 38선을 중심으로 한 고지전(hill battle)이었다.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 중령 페렌 바크는 “힘을 시험한 전쟁이 아니라 의지를 시험한 전쟁이었다”고 했다(‘이런 전쟁’, 1963).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남한을 적화하려는 야망이 강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훈련받지 못하고 기강이 부족한 한국군과 미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고 한탄하고, 군(軍)은 내일 축구 시합에 나가는 선수들처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나마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세계가 지상군을 파견하여 즉각 대응한 것은 대한민국을 수호하려는 신의 가호였다.

전쟁 발발 후 70년이 지나면서 남북한 간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 군사력 평가 업체 글로벌파이어파워(GFP)의 2024년 세계 군사력 평가 순위에서 한국은 5위에 올랐다. 반면 북한은 36위를 기록했다. 국방 예산 항목에서 한국은 약 53조원으로 11위, 북한은 4조6000억원으로 58위다. 여기까지는 남한의 군사력이 북한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평가는 북한의 핵무기를 포함하지 않았다. 재래식 무기에서는 남한이 앞서지만 핵무기를 포함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핵무기의 비대칭성(asymmetric)은 재래식 무기의 우세를 무력화한다. 한미 동맹의 확장 억제 전략으로 북한군의 핵 공격을 방어해야 하는 과제는 우리 안보의 심각한 도전이다.

전쟁 수행 능력에서도 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을 압도한다. 최근 김정은은 묘향산에서 북한 지도부에게 지방 경제의 고난과 기본적인 물자 부족 등을 질책했다. 군수산업에 주력하고 인민 경제를 경시한 결과이다. 북한은 1946년 토지개혁 결과로 6·25 남침 직전 식량 생산량이 해방 당시와 비교해서 2배에 달하는 240만톤에 도달했다. 전쟁 수행 능력이 구비된 1950년과 기초 생활 물자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는 2024년은 상황이 다르다.

다만 작금의 국내 정치 분열은 해방 정국 당시 못지않게 우려스럽다. 눈에 안 보이는 안보(安保)에서 정치권의 분열은 국가의 방어능력을 약화시킨다. 김정은은 남한 영토 점령, 수복의 헌법 명기를 선언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처럼 기습 공격에 그치지 않고 서해 취약 도서를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서해 지도를 펼쳐 놓고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쟁은 억지(deterrence)가 최우선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이 상책(上策)이다. 다만 ‘싸울 수밖에 없다면 이겨야 한다’는 것이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의 핵심이다. 평양은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한 묶음으로 엮어서 한미일과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를 형성하고자 한다. 훈련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스마트 외교를 추진한다면 적은 ‘치명적 타격’은 물론 국지적 도발도 감행하지 못할 것이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