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2월 28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3일 차 회의에 참석해 앉아 있다./조선중앙TV 뉴시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2월 28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3일 차 회의에 참석해 앉아 있다./조선중앙TV 뉴시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2만6000명의 소수 병력으로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공했다. 당시 유럽 최강국이던 로마는 매년 9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해 총력 항전했으나 한니발의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연전연패를 면치 못했다. 한니발은 그 후 16년간이나 이탈리아반도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10여 개 도시국가로 구성된 로마연합 구성국들이 로마를 배신하고 카르타고에 자진 복속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니발 군대의 압도적 위세에도 불구하고 한두 개 도시국가만 로마를 배신하는 데 그쳐, 결국 한니발의 로마 정복은 실패했다.

6·25 전쟁 당시 남로당 총수 박헌영은 북한군이 일단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전역에서 좌익 세력의 봉기가 촉발되어 쉽사리 통일이 달성되리라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북한이 기대했던 봉기는 어디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일단 우크라이나 합병을 위한 전쟁의 기치만 올리면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친러시아 봉기가 이어져 사흘이면 평정이 가능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어디서도 친러시아 봉기는 없었다. 이런 현상은 시진핑이 대만을 침공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1973년 ‘고려연방제’ 방식의 평화통일을 제창한 이래 50년간 이를 고수해 왔다. 이는 남북이 각기 기존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하나의 연방제 국가로 통합하자는 주장이다. 그 주장의 이면에는, 연방제 통일이 이룩되면 남한 내 친북 세력의 협조로 북한이 연방정부와 의회에서 압도적 주도권을 장악하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는 말하자면 북한 방식의 평화적 대남 흡수통일 구상이었다.

북한은 과거의 대남 군사적 우위가 점차 사라지고 1990년대 들어 무력통일 역량이 급속히 쇠퇴하자 비군사적 방법으로 남한을 흡수통일하기 위한 고려연방제와 평화체제 구상에 더욱 집착했다.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남한 내 우호 세력의 적극적 호응이 필수적이었으나, 실제로는 북한의 기대에 못 미치는 불만스러운 수준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2000년 6·15 남북공동성명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에 대한 의견이 접근되었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에서 ‘6·15 선언의 적극 구현’이 합의됐으나,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의 9·19 평양공동선언에서는 연방제 통일 문제가 자취를 감췄다.

연방제 통일안이 표방하는 일국가이체제 논리의 중요한 시험대였던 홍콩의 민주주의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힌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민족 문제에 무관심한 MZ세대까지 등장해 고려연방제가 설 땅은 사라졌다. 국내 친북 세력에게도 이제 북한 문제는 단지 정치적 수단일 뿐, 누구도 여생을 북한에서 보내거나 자식을 북한에 유학 보낼 사람은 없다. 그들이 북한에 제공해 온 경제원조도 유엔 제재로 차단되었고, 북한이 천신만고 끝에 이룩한 핵무장도 한국에 대한 북한의 우월성을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무심한 세월의 변화 속에 오직 북한 당국만이 대남 흡수통일의 헛된 망상을 간직해 왔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새해 벽두 대남담화문을 통해 한국을 ‘대한민국’이라 칭하면서 남북 관계를 민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국가 관계’로 규정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한국을 ‘주적’이라 칭하며 한국이 무력 사용을 기도하거나 북한의 주권과 안전을 위협하면 역량을 총동원해 초토화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북한 움직임은 대남 위협이라기보다는 고려연방제를 통한 대남 흡수통일 환상의 종말을 합리화하는 동시에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 가능성에 대한 숨겨진 두려움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이런 대남정책 변화는 우리 대북정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한국은 자유민주 체제로의 평화통일을 추구해 왔으나, 합의를 통한 분단국 평화통일의 성공 사례는 인류 역사상 선례가 없다. 핵무장 북한이 아무리 심각한 경제난에 처한들 스스로 공산체제를 버리고 투항해 올 가능성도 없다. 고려연방제가 비현실적이었듯이 우리 통일정책도 현실성은 적어 보인다. 그러니 이젠 우리도 남북관계를 애매한 특수관계로 취급하기보다는 차라리 국가 간 관계로 정립해 국제법을 적용하는 것이 남북 협력과 안보 관리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과거 분단시대의 동서독 관계도 양측 외교부가 관할하는 국가 간 관계였으나, 이는 독일 통일에 아무 장애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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